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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IS h-well 문학콩쿠르
촉촉한 
비 
내리는 
날의 추
억

누구에게나 비오는 날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비에 대한, 그리고 그 빗속에서 만들어졌던 특별한 추억을 떠올리며 독자들이 보내온 ‘촉촉한 비 내리는 날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리 편집실

 
처음 그 느낌
그대로
김수정 (부산시 수영구)

“오늘 저녁부터 비가 많이 온대요. 우산 잘 챙겨 나오세요.” 살가운 문자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온다는 말에 축 늘어진 오징어마냥 집에 늘어져있고 싶은 마음뿐. 몇 번이고 약속을 연기할까 취소할까 고민만 하다 약속을 미루기에도 애매한 시간이 되어버려 나가보기로 했다. 한참 가리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소개팅을 나가다, 이젠 좀 지쳐있던 때였다. 여러 사람들과의 잦은 만남에도 쉽게 인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역시 기대는 없었다. 만남 전에 나누었던 연락들로 유쾌하고 선한 사람일거라는 인상은 받았지만, 미루어 기대치 않기로 했다.
약속시간, 먼저 도착한 내 앞에 작은 비닐우산을 들고 수줍게 인사하는 남자가 보였다. 우산 잘 챙겨 나오라더니 정작 본인은 일회용 비닐우산이라니 웃음이 났고, 왠지 그런 그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6시에 만나 한 시간 만에 파스타를 라면처럼 먹어 치우고, 7시도 되기 전에 커피숍으로 이동했다. 수더분한 인상의 이 남자와 얘기를 나누며, 지금까지 해오던 소개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소개팅이라는 생각조차 안들만큼 그저 편하고 재밌고 유쾌했다. 무엇보다 유쾌함 속에 간혹 드러나는 그의 수줍음과 진지함이 좋았다.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한참을 신나게 얘기하다 시간을 보니, 벌써 밤 12시였다. 고작 한두 시간 지난 것 같았는데 커피 한잔 앞에 두고 쉼 없이 다섯 시간이나 수다를 떤 것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 정말 몰랐네요” 하고 일어서는데, 그제서야 그 사람은 부산 집이 아닌 통영의 관사로 간다고 했다. 밖에는 이미 비가 억수처럼 내리고 있었다. “진작 말씀해주셨으면 일찍 나섰을 텐데요. 통영까지 가시려면 힘드실 텐데 너무 오래 있었네요”라며 미안한 기색을 비추자, 아니라며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그런데 카페를 나선 그가 나와 걸음을 맞추지도 않고 빠른 종종걸음으로 혼자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나와 함께 걷는 것이 부끄러워 빨리 가나 하고 “같이 좀 걸어요”라며 그를 불러 세웠지만 그의 걸음은 자꾸만 빨라졌다.
지금의 신랑이 된 그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본인은 빨리 통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너무 신나 보여 차마 말을 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도대체 언제 일어서자고 할는지 초조해하며 눈치만 봤다고. 카페를 나와서도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이 빨랐던 거라고. 한참을 남편도 나처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다는 생각에, 나와 같이 걷는 것이 부끄러워 앞장서 갔을 거란 생각에 행복해했던 나는 크나큰 배신감(?)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은 나만 신나서 들떴던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폭우가 내리는 밤이면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일회용 비닐우산을 앞장서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설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