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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IS h-well 문학콩쿠르
펑펑 

눈이 내리는 날의 추억

1999년 개봉한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기억하시나요? 여주인공 히로코는 하얀 눈밭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장면을 볼 때면 눈 내리던 날의 그 사람, 그 장소가 생각나곤 합니다. 12월은 눈이 오는 날이면 문뜩 떠오르는 추억 속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해볼까 합니다. “모두 잘 지내시나요?”
정리 김희란 기자

 
눈 오는 날의 약속
이윤서(경기도 군포시)

“선생님께, 경례~~” 하는 반장의 말과 함께 수업이 끝났다. 하지만 마음에는 돌덩이가 얹힌 듯 무거웠다. 교실 유리창 밖에는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이 정도의 눈이라면.’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인가? 초겨울 즈음 집에 오면서 친구와 둘이 했던 말이 있었다.
“야, 우리 언제 어디서든 눈이 펑펑 내리면, 그러니까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면 서로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라면 끓여 먹자.”
지금 생각하면 펑펑 눈 내리는 날 만나서 친구 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게 뭐 그리 즐거운 일이었을까 싶지만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에는 그 하나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런데 그 친구와 다퉜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시험을 못 본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는지 나보다 시험을 잘 본 친구가 ‘공부 못하는 애들.’하는 소리에 화가 나 함께 떡볶이 먹다가 나와버렸다. 그 이후 학교도 혼자 가고, 집에도 혼자 갔다. 행여 학교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쌩하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이러면 친구가 다가와서 미안해, 하고 사과할 줄 알았는데 하지 않는 게 더 속상하고 미워서 마음속으로 혼자 절교를 선언했다.
펑펑 오는 눈을 맞으며 아쉽고 속상한 마음에 머리가 복잡했다. 터벅터벅 눈 맞으며 걸어가는데 ‘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내 친구! 갑자기 눈물이 눈보다 더 많이 쏟아졌다.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지만 나도 내 친구가 보고 싶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서로 무슨 죄인인 양 잘못했다면서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이 모습을 본 큰 오빠가, “하여튼 여자들이란, 유난을 떨어라! 언제는 다시 안 볼 것처럼 하더니만! 빨리 들어와서 라면이나 끓여!” 하면서 들어갔다. 그 말에 우리 둘은 낄낄 웃으며 집에 들어와 라면을 함께 끓여 먹었다. 다시는 싸우지 말자는 약속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우정이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우산도 없이 우리 집 앞에 서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내 친구 때문이다. 그날 이후, 한 번쯤은 자존심을 접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어야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