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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IS h-well 문학콩쿠르
시월, 바람결에 전하는 안부

시월의 선선한 바람과 부드러운 햇살에 문득, 잊고 지냈던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학창시절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쑥스러워 말 한번 걸지 못했던 옛 첫사랑은 어떻게 사는지,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 잊고 살았던 옛 추억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스치는 바람결에 마음을 담아 안부를 전해봅니다. 모두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정리 김희란 기자

  선생님, 
그때 죄송했어요

김복순(경기도 의정부시)

고1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갓 부임한 분이셨다. 선생님을 뵙는 순간 우린 단박 그 분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 미남은 아니었지만 호방한 성격과 육군 소위 출신의 이력, 게다가 씀씀이 또한 컸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성장기, 우린 걸핏하면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간식을 사 달라고 졸랐다. 마음이 약한 선생님은 때마다 거절하지 못하고 주머니를 털곤 하셨다. “그 대신 너희들 이번 시험에서는 꼭 일등 해야 한다?!”고 하시며.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우린 점점 이 일에 재미를 붙였다. 점심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종종 선생님을 끌고 매점으로 향한 것이다. 하도 자주 찾아가자 선생님께서도 귀찮으셨나 보다. 어느 날 “매점에 내 외상장부가 있으니까 내 이름 대고 너희들이 알아서 먹고 싶은 걸로 먹어라.”하셨다. 그러나 매점에서는 극구 선생님의 친필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결국 우리는 선생님의 사인을 도용, 풀방구리 드나들 듯 매점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은 흘러 선생님의 월급날. 종례를 하러 오신 선생님의 얼굴이 어두운 것 같았다. 죄가 있는 터라 바짝 긴장했는데, 선생님께선 되레 환하게 웃으셨다. “이 녀석들아.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어야지. 선생님 첫 월급이잖아. 쥐꼬리만 한 월급이 반 토막도 안 남았다.” 그리곤 얼마 안 남은 월급봉투를 열어 반 아이들에게 고루 핫도그와 우유를 사 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선생님께는 홀어머니와 돌봐야 할 동생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니 선생님 연세가 당시 스물여덟, 돈 쓸 데는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단풍이 곱게 물들 무렵이면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 안부 인사를 여쭌 지도 한참이 지났다. 조만간 선생님을 찾아뵙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려야겠다.

  나의 첫사랑 
그대

박지영(서울시 중구)

찬바람이 조금씩 옷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입니다. 깜짝 놀라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면 거기에 늘 그렇듯이 푸른 하늘이 보이고, 그 사이로 오래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다 했던 말들이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제게 쏟아지는 것 같아 멈칫하곤 합니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어두운 골목길에 숨어 있다가, 잊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 느닷없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 놀라게 합니다. 왜 한 번쯤 말하지 못했을까? 왜 한 번쯤 다가가서 나를 좀 봐달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슬쩍 편지라도 한 통 써서 건네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남들이 볼까봐 무서워 꺼내기조차 부끄럽고, 소중해서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아스라함이 있어서인지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대에게 눈빛이라도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할 때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여운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벌써 몇 십 년의 세월을 지나왔는지, 그랬는데도 아쉬움과 잔물결이 이는 것을 보면 아주 많이 생각하고 생각했었구나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마음 이대로 간직하려 합니다. 그때의 여리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을 보이지 않았음을 후회하지 않고, 잘했다고 묻어두며 한 번씩 저 혼자만 꺼내보려 합니다. 외로움이 가득 차오를 때 그대를 생각하며 여전히 잘 지내고 있겠지 하면서, 어쩌면 그대도 아는 척 하지 않았을 뿐,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한 기대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위로하렵니다.
가을입니다. 낙엽 한 장 주워 책갈피에 꽂으며 그대에게 쓴 편지에 붙여 보낼까 망설이던 그 가을입니다. 그 때 보내 못했던 편지를 지금에서야 살짝 띄워 보내며, 그대가 나의 첫사랑이었음을 가을 바람결에 속삭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