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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14

Hope for Health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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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신체를 노출하는 것을 꺼렸던 옛 선비들은 한여름, 더위를 쫓고 학문과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이러한 행위, ‘탁족’이라는 말은 『맹자(孟子)』의 한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창랑의 물이 맑음이여 나의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림이여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굴원(屈原)의 고사에서 유래한 이 문장은 물의 맑음과 흐림이 그러하듯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처신과 인격 수양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문사들과 화백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던 ‘탁족’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백외준 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원

여름날의 마음 공부

탁족(濯足)

물은 스승이다

옛사람들에게 물은 훌륭한 스승이었다. “최상의 착함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고 한 노자의 명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맹자는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고 하여 점진적으로 단계를 밟아나가는 학문의 길을 물에 비유하여 밝혀 놓았다.
금수강산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물 사랑도 이에 뒤질 리 없었다. 일찍이 퇴계 이황은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디 않는고”하고 노래하여 물의 성실한 덕을 찬양했다. 그뿐인가. 고산 윤선도에게 “좋고도 그칠 일없기는” 오직 물뿐이었으니 저 유명한 오우가(五友歌) 속 첫째가는 친구도 다름아닌 물이었다.
이처럼 옛사람들에게 물은 한갓 자연현상이기를 넘어 그 유연성, 성실성, 투명성으로 말미암아 도덕적 삶의 지표가 되었다. 그래서 물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마치 시루 속 콩나물처럼 물의 착한 성품이 제 안에 스며들게 하여 조금씩 완성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수양과도 같았다.

탁족, 물과의 진한 만남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함부로 몸을 드러내어서는 안되었다. 몸이 흐트러지면 마음 역시 온전할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삼복더위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관을 차려입고 지내는 것이 사대부의 바른 몸가짐이었다. 버선도 벗어서는 안 되었다. 앞섶을 헤치고 부채질을 한다든지, 길 가다 물에 풍덩 뛰어든다든지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같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할 때 탁족은 사계절 내내 답답한 의관 속에서 살았던 그들이 그나마 가장 ‘진하게’ 자연과 접촉할 수 있는 행위였다. 1년 중 장마가 끝나고 난 뒤인 소서 무렵이 탁족하기에 가장 좋은 때였는데 이 즈음 서울 양반들은 삼삼오오 모여 종자(從者)들에게 짐을 지우고 장맛비에 불어오른 삼청동이나 남산 등지의 계곡을 찾았다.
물을 찾은 사람들은 그늘 좋은 곳에 자리를 깐 뒤에 바지 걷고 버선 벗어 물에 발을 담갔다. 그러다 배가 꺼지면 가져온 음식들로 주안상을 차려 동행과 나누어 먹음은 오늘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한편에선 한시를 지어 주거니 받거니하며 시회(詩會)를 여는 축도 있었고, 저편에선 악사를 데려와 풍악을 울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 시원한 물가에서 더위를 쫓고 나면 굳은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려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옛 성현들처럼 물가를 굳이 수양처로 삼지 않아도 좋았다. 잠시 내 몸과 물이 하나됨을 느끼면 그만이었다.

여름날 비 온 뒤 물에 발을 담그고

조선시대 탁족에 관한 수많은 시가 전하지만 그 중 뜻이 잘 와 닿고 외우기 쉬운 것 하나를 골라 소개한다. 「여름날 비 온 뒤 산골 물에 발을 담그고 우연히〔 夏日雨後 濯足山流 偶吟〕」라는 제목의 시(그림 아래)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인 물을 퍼서 더위를 식히는 판국이었는데 밤사이 내린 비 덕분에 이렇게 맑은 계곡물에 발 담그고 놀게 되었으니 지금이 얼마나 좋은 때인가 하는 느낌을 담은 시이다. 원문과 함께 반복해서 읽으니 어디선가 물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풍기, 에어컨 바람에 취해 있지 말고, 흐르는 물에 발 담그러 가자. 그리고 발가락 사이에서 들려오는 여름물의 소리에 귀를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