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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약이다 그게 사랑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표현에는 우리의 정서가 담겨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의 반대가 되는 표현은 ‘아는 게 힘이다’가 아니라 ‘아는 게 병’이라는 표현이다. 의미상으로는 반대가 아니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반대라는 의미이다.
모르는 게 약의 반대말은 아는 게 병

우리 속담과 격언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과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있어서 말장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기가 모를 때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로 피해 가고, 자신이 알면 아는 게 힘이라며 잘난 척을 한다. 물론 공부하라고 훈계를 할 때도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유용하게 쓰인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우리말 표현은 아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정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물론 오랫동안 사용하였기에 우리의 정서도 어느 정도는 담겨 있을 수 있다.

알아서 생기는 병, 노이로제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은 언제 사용될까? 언제 몰라야 좋은 것이고, 알면 나쁜 것일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몰랐으면 아무 문제되지 않았을 텐데 알아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때는 정확히 알지 않고 어슴푸레한 지식으로 알고 있어서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 행복할까? 손바닥에 수많은 균이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산다면 어떨까? 내가 먹는 음식의 성분들이나 위해성을 안다면 더 행복할까? 물건에서 균이 옮을까 다른 사람이 쓰던 물건을 만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게 괜히 알아서 생긴 병이다. 흔히 예전에는 이런 경우를 노이로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때

속담은 사용의 현장이 중요하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어려운 과학 이야기나 지식 이야기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렇다면 언제 이 속담은 쓰였을까? 정작 이러한 속담이 쓰이는 현장은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이 커서 생긴다.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과 마음에 대한 약을 의미한다. 장면을 생각해 보자. 멀리 떠나 있는 식구에게 굳이 남아있는 가족의 병을 알릴 필요가 있을까? 반대로 내가 멀리에 떠나 있는데 굳이 내 병이나 고통을 식구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 안다고 하여도 어찌 할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알리지 않고 숨긴다. 그러고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되뇐다.

고통도 아픔도 나눠서 가벼워지지 않을 때

예전에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고, 사정들이 넉넉하지 않아서 숨기고 감추고 알리지 말아야 하는 일이 많았다. 부모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반드시 곧바로 알리는 게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자식이 멀리 해외에 나가 있어 곧바로 돌아올 수도 없는데 부모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미리 알려서 남아있는 시간을 슬픔에 빠져있게 할 수는 없었다. 알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도 모르고 자꾸 부모님의 건강을 묻는 상황이 저리게 아프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였던가? 허나 슬픔도 고통도 아픔도 나누어서 가벼워지지 않을 거라면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함께 고통이 된다면 모르는 게 약, 그게 사랑이다

내가 아픈 것을 부모님이 아신다면, 내가 슬픈 것을 자식이 안다면, 내가 고통스러운 것을 그녀가 안다면, 나의 무너짐에 더 털썩 주저앉을 그들이 내 눈앞을 가려온다면 모르는 게 약이 아닐까? 내 아픔이 부모께도 슬픔이 된다면, 내 슬픔이 아이들에게도 고통이 된다면, 내 고통이 그에게도 아픔이 된다면 모르는 게 약이 아닐까? 내 눈에서는 슬픔이 뜨겁게 흐르지만 그래도 내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남을 수 있다면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게 병이다. 그게 사랑이다. •

조현용 교수

글 : 조현용 우리말 어휘학자

우리말 어휘를 공부하고 있으며, 재외동포와 외국인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말 선물>, <우리말의 숲에서 하늘을 보다>, <우리말 깨달음 사전> 등 다수이며, 최근에는 일본인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책 <한국어로 세상 읽기>를 펴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