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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괴롭다’는 말은 ‘고통(苦痛)’의 고(苦)에서 왔다.
‘이롭다, 해롭다’처럼 ‘고롭다’라는 단어였는데,
글자의 모양이 바뀌어 한자어라는 생각이 옅어진 단어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다.
이 고통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살 수 없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고통과 고통의 사이사이에는
즐거운 일들이 있다.
계속 고통스럽기만 한 사람은 없다

하루 종일, 일년 내내 고통스럽기만 한 사람은 없다. 정말 끔찍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웃을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을 못하고 지금 이순간 너무 고통스럽고, 내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하면 당연히 살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슬픔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슬픔과 고통도 옅어지게 마련이다. 고통이 행복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힘든 일 더 오래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

분명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총량을 말해보라고 하면 최소한 절반 이상은 행복일 것이다.
오늘은 이 사람을 만나서 힘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울 수 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나를 위로해주고 따듯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더 많다.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온통 불행한 것처럼 생각된다.
정말 자신이 고통스러운지 아닌지는 밥을 먹어보면 금방 안다. 정말 힘들다면 밥이 안 넘어간다. 지금 내가 밥 먹을 힘이 있고 밥을 먹고 있다면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음식이 맛이 있다면, 노래가 듣기 좋다면, 여행을 가고 싶다면 행복한 것이다.

성현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

우리가 성현이라고 일컫는 소크라테스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철학자로 이름을 알린 퇴계 이황 선생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나는 퇴계 선생의 생애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결혼을 해서 둘째 아이를 낳다 부인이 떠나 홀아비가 되었다.
엄마 얼굴도 모른 채 자란 둘째 아들은 결혼을 하루 앞두고 비명횡사 한다. 그래서인지 퇴계 이황 선생님의 글을 보면 다른 사람의 고통도 나의 고통처럼 생각하는 게 느껴진다. 고통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다.

고통의 총량, 행복의 총량을 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엄청난 고통을 안고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총량은 절대 행복의 총량을 넘지 못한다. 살다 보면 분명 웃을 일이 있고, 고통보다는 행복한 시간들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 행복은 내가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힘들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책을 읽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 •

조현용 교수

글 : 조현용 우리말 어휘학자

우리말 어휘를 공부하고 있으며, 재외동포와 외국인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말 선물>, <우리말의 숲에서 하늘을 보다>, <우리말 깨달음 사전> 등 다수이며, 최근에는 일본인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책 <한국어로 세상 읽기>를 펴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