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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답사기
세계의 유산이 된
정조의 꿈
수원 화성

왕이 되자마자 사도세자를 복권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성으로 옮겼던 정조. 이토록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팔달산 아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실용적인 성을 축조하며 그만의 개혁 정치를 꿈꾸었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은 그가 49세 되던 해 갑자기 생을 마치게 되면서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간 개혁 성군, 정조. 겨울이 시작되려는 즈음, 화성의 높고 기다란 성곽을 걸으며 정조가 못 다 이룬 꿈을 한 번 쫓아가 보면 어떨까?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수원 화성

‘화성은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에 적힌 글귀이다. 화성을 축조하며 정조가 품었다는 그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선시대에 지어진 성곽. 화성의 의미는 이보다 훨씬 크다. 일단 외적인 측면만 보자면 둘레만 5,744m, 높이 약 2장 5척. 4개의 대문, 4개소의 암문, 4개소의 각루, 5개소의 포루, 치성 10개소, 적대 2개소를 포함한 실로 엄청난 규모이다. 형태 또한 남달라 중국,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으로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21차 총회에서는 동서양의 건축기술이 충분히 활용되면서도 여러 건축물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여 수원 화성을 세계 유산으로 등재했다.

정조, 개혁의 꿈이 엿보이는 설계

정조는 이곳을 처음부터 읍성과 방어용 산성이 함께 존재하는 성곽도시로 계획하였다.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개혁을 시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곳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자신의 야망을 함께 구현해갈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게 화성 축조를 맡겼다.
축성공사는 1794년 1월에 시작되어 1796년 9월 초에 끝났는데 장장 2년 9개월 동안 70만 명이 18만 7천여 돌덩이로 시설물 48개와 성곽 5.7km를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10여 년이 걸릴 거라 예상했던 성곽 축조는 첨단 기술과 과학적 시도가 있었기에 단 3년여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석제와 벽돌의 병용, 화살과 창검, 총포를 모두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 녹로, 거중기 등 신기재를 이용하여 건축에 동원된 백성의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화성축조의 모든 것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기록하여 남겼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꿈과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화성은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에 적힌 글귀이다. 화성을 축조하며 정조가 품었다는 그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방어, 물류, 무역의 중심지로

수원 화성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성이 군사적 기능만을 관장하는 성곽이 아니라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을 함께 둔 평산성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원 화성에는 우리나라 성곽에서 보기 드물게 많은 방어시설을 설치하였으며 망루, 총안, 총구멍 등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제반 시설들은 지형조건을 최대한 살려 배치하였다. 팔달산 높은 곳에는 군사지휘소인 서장대 동장대, 외부와의 통신 시설인 봉수대를 세우고 낮은 곳에는 사람들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장안문과 팔달문,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운 것이다. 교통시설도 눈여겨 볼만한데 화성의 유수부 앞에는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 등 신작로를 만들었고 그 주변으로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의 역할을 하게 했다. 즉 정조는 이 도시를 통해 군사적 방어도시는 물론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중심지를 구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문화재로서의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크다. 일단 화성의 성문들. 이들은 조선시대 성문들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이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남문인 팔달문은 사통팔달 통하는 문으로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여장을 돌린 다음 2층 누각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규모와 건축 기법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장안문 등의 대문들은 팔달문과 구조가 비슷하다. 수원 화성은 건축미 또한 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손꼽히는 곳은 방화수류정. 수원성의 북수구문인 화홍문의 동쪽 벼랑 위에 있는데 그 아래 용연이라는 인공 연못을 두어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아자형 평면 구조이며 현판의 글씨는 원곡 김기승이 썼다. 화성의 성벽을 만든 소재 또한 눈여겨 볼일이다. 화성 성벽은 화강암뿐 아니라 벽돌이라는 흙으로 만든 신소재가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에 석회를 섞어 성을 쌓으면 화포의 충격에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우리나라 성벽은 벽돌 사용이 급격히 늘게 되었다.
성의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의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되는 수원 화성. 성곽의 견고함을 갖추면서도 교통의 원활함과 생활의 편리함, 아름다움까지 두루 챙긴 화성의 건축물들은 정조 실록 15년에 쓰인 정조의 뜻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의 꿈이 미완으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이제는 세계의 유산이 된 정조의 못다 이룬 꿈, 수원 화성(水原華城) 에서 직접 만나보기를 바란다.

한눈에 보는
수원 화성 주변 볼 거리 & 즐길 거리
팔달문 옆 재래시장
1 팔달문 옆 재래시장

보물 제 402호, 수원 화성의 4대문 중 남대문인 팔달문 옆에는 수원에서 가장 큰 시장들 서너개가 모여 있다. 미나리꽝시장, 지동시장, 못골시장, 영동시장. 성곽길을 걷고 나서 간단히 목을 축이거나 없는 것 없는 재래시장에서 시장의 활기를 만나보기 바란다.
문의: 팔달문시장 031-254-8996

화성 행궁
2 화성 행궁

전체 557칸에 이르는 화성 행궁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정조가 잠시 머무르던 곳으로 웅장하고 활용도가 높았던 행궁이다. 정조 18~20년 화성 축성 뒤 성 안에 건립한 것으로 정조가 만들어가고자 했던 신도시의 밑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문의: 수원 화성행궁 031-228-4677

수원화성박물관
3 수원화성박물관

조선시대 성곽문화의 꽃이자 우리 민족 문화유산의 자랑인 수원 화성을 알리고자 건립된 수원 화성박물관. 상설 전시공간으로 거중기 등 유물은 물론 축성 과정과 도시 발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매년 특별전시도 기획하므로 미리 확인하고 방문하면 더욱 좋겠다.
문의: 수원화성박물관 031-228-4242

현재의 도심과 화성이 어우러진 성곽길
4 현재의 도심과 화성이 어우러진 성곽길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서북각루, 화서문 북서포루 장안문까지, 잠시 쉬고 화홍문, 방화수류정과 북암문, 동장대, 창룡문을 거쳐 동남각루로 나오는 화성 성곽길. 한 시간 남짓 걷는 성곽길에는 화성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 잘 어우러져 있다.
문의: 수원문화재단 031-290-3600

화성 행궁 옆으로 수원 공방거리
5 화성 행궁 옆으로 수원 공방거리

수원화성문화관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새로 조성된 공방거리가 나선다. 이곳에서는 드림캐처나 조각보, 도자 등 직접 만든 한국적인 것들이 눈에 띈다. 화성 행궁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있다. 직접 체험까지 가능한 이곳에서 오래 간직할 추억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문의: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수원공방거리

한국의 세계유산
  • 9월) 해인사 장경판전
  • 10월) 남한산성
  • 11월) 백제역사유적지구
  • 12월) 수원화성
  • 1월) 종묘
  • 2월) 조선왕릉
  • 3월) 하회마을
  • 4월) 경주역사지구
  • 5월) 강화 고인돌 유적
  • 6월) 창덕궁
  • 7월) 석굴암과 불국사
  • 8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글 : 신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