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튜디오 안.
생방송을 앞두고 마이크를 점검하는 시선에도,
연필을 꼭 쥔 손에도, 헛기침을 내뱉는 입가에도
세월이 사뿐 내려앉았다. 익숙한 듯 금세 준비가
마무리되고 방송 시작을 알리는 조명이 켜지자,
세월을 비켜간 목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라디오 DJ로 활동 중인,
정기항(74) 씨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
글. 정은주 기자 사진. 김나은(holic studio)
원로 성우, 시니어를 위한 라디오 DJ가 되다
오직 목소리만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해야 하는 성우에게 평균 이상의 풍부한 감성은 필수다. 물론 타고난 음색이 가장 중요하지만 주변에 대한 애정과 감탄을 아끼지 않는 태도는 목소리에 특별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27세 때 동양방송에서 성우 활동을 시작한 정기항 씨. 이후 KBS에서 따뜻한 중저음 톤으로 할아버지 스머프, 제페토 할아버지, 산타클로스 목소리 등
을 연기한 지 어느덧 50년이 다 되어 간다.
정기항 씨는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전혀 무뎌지지 않은 감성과 감각으로 마이크를 당당히 마주한다. 하루에도 몇 작품씩 밤새워 녹음하던 성우로서의 전성기는 후배들에게 내주었지만
요즘 시니어 라디오 DJ로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는 3명으로 구성된 팀원들과 함께 매주 화, 금요일마다 서울 노인복지센터에서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한다. 총 4개 팀이 있는데다 팀 내에서도 번갈아 가며 아나운서, 엔지니어, 모니터를 담당하기에 마이크 앞에 앉는 건 한 달에 2~3번 남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