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를 한 가지 이미지로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남해에서 소문난 청정한 바다 풍경, 그곳 깊은 갯벌에서 캐 올린 꼬막의 짭짤하고도 달큼한 맛, 소설 <태백산맥>과 중첩되어 흐르는 묵직한 감성 같은 것들이 뒤섞인 곳이니까. 이곳에서는 함부로 주먹자랑 말라고들 하지만, 겪어보면 순수하고도 평온한 벌교로 간다.
글. 정은주 기자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는 필요 없다. 벌교는 그냥 벌교로 통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보성군에 속한 읍내지만,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오래 전부터 그렇게 굳어졌다. 일단 바다가 그야말로 예술이다. 벌교와 순천, 고흥, 여수로 둘러싸인 여자만은 남해에서도 깨끗하기로 이름난 곳.
햇빛과 바람을 만나 푸르게 빛나는 바다는 이색적이다 못해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큰데, 과거 보성, 순천, 고흥 등의 내륙을 잇는 포구가 바로 벌교였던 까닭이다. 물론 지금은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 개발이 한창 진행됐던 흔적은 아직까지 예스럽게 남아 있다.
아마 소설 <태백산맥>도 사람들의 뇌리에 벌교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큰 몫을 했을 터다.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벌교니까. 게다가 허구와 실제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건물이며 길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벌교는 여전히 <태백산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학기행지로 유명하다. 물론 꼬막도 빼놓을 수 없다. 꼬막이라는 이름에 역시 <태백산맥>과 얽힌 일화가 있는데, 당시 표준어로 쓰이던 ‘고막’ 대신 작가가 지역의 발음대로 ‘꼬막’이라 소설에 표기한 것이 사람들이 입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결국 ‘꼬막’이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뭐든 스토리를 이해해야 눈길이 더 애틋해지듯이 벌교도 마찬가지다. 벌교를 설명하는 큰 축 중 하나가 <태백산맥>인 만큼 소설 속 주 무대들만 제대로 훑어도 감흥이 몇 배로 커질 게 분명하다. 꼭 들러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자면 일단은 보성여관이 첫 번째다.
소설에서는 남도여관으로 나오는데, 전통 한옥과 일본식이 혼합된 건물로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지어졌다. 요즘으로 치자면 5성급 호텔 정도. 물자와 사람이 모이면서 급격하게 번창했던 흔적인 셈이다. 현재는 일부가 복원되어 숙박시설과 전시실, 카페 등으로 운영 중이다.
일본 양식이 가미되어 이색적인 현부자네 집을 비롯해 맞은편 소화의 집도 소설 속 묘사 그대로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학살당한 소화다리, 소설에서 벌교의 근원이자 상징으로 등장하는 홍교, 김범우의 집 등도 걸어서 모두 둘러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다. 만약 벌교와 <태백산맥>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태백산맥문학관을 방문하는 것도 방법이다. 벌교의 역사부터 집필 전 취재 과정, 육필 원고 등이 알차게 전시되어 있다.
다듬어지고 이야기가 입혀진 벌교 말고, 날것으로 펄떡이는 현재의 벌교를 경험하고 싶다면 벌교장에 가야 한다. 끝자리가 4‧9일인 날 장이 서면 청정 바다에서 잡아 올린 꼬막, 모시조개, 낙지, 주꾸미 등 해산물이 잔치를 이루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맘때 제일은 두말할 것도 없이 꼬막. 우리나라 꼬막의 75%가 벌교에서 나는데,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딱 제철이다. 지금 실컷 맛보지 않으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벌교 꼬막은 여자만의 깊고 청정한 갯벌에서 3~4년 이상 자란 것들이라 육질이 쫄깃하고 탄탄한 것이 특징이다. 짭짤하면서도 달큼한 맛은 삶든, 양념에 무치든, 국을 끓이든, 어떻게 먹든 여운이 길게 남는다. 게다가 산지의 싱싱함은 어떤 조리 방법도 따라갈 수 없는 궁극의 맛을 자아내는 법. 덕분에 벌교에 즐비한 꼬막 전문점 어디를 가더라도 기대 이상의 미식을 경험할 수 있다.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 타우린 성분이 풍부해 건강에도 이롭다는 사실. 여독이 쌓였다 싶을 때 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꼬막 한 상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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