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순서나 우열을 정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때 ‘가위, 바위, 보’만큼 편리하고도 간단한 것이 없다. 저마다 한 손을 내밀되 손가락의 모양을 달리 해서 승부를 가릴 수 있다. ‘주먹, 가위, 보자기’로 각각 부수고, 자르고, 싸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도 재미있다. 간단한 이 놀이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영어로는 ‘paper(종이), scissors(가위), rock(바위)’이라 하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과 인도가 거론되는데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나이가 든 세대들은 ‘짱껜뽕’이나 ‘짱깨미쑈’ 같은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일본어 ‘쟝켄뽕(じゃんけんぽん)’에서 유래한 것인데 소리가 바뀌어 지방이나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는 것이다. 또한 손바닥을 위아래로 향하게 하여 편을 가르는 ‘데덴찌’ 또한 일본어의 ‘데덴찌(ててんち)’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이들 놀이를 부르는 이름이 따로 없어 일본어 그대로를 쓰는 것이라고 넘겨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손으로 하는 비슷한 놀이인 ‘묵찌빠’에 이르러서는 약간 섬뜩해진다. 이 말 역시 일본어의 ‘구찌빠’에서 유래한 것인데 차례로 ‘군함, 침몰, 파열’을 의미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놀이인 것이다.
묵찌빠에 군국주의의 망령이 서려있음을 알게 되면 이 놀이를 하는 것이 왠지 꺼림칙해진다. 이러한 느낌은 우리의 삶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어의 잔재를 대할 때도 갖게 된다. 산업 현장에서 쓰는 말, 당구를 비롯한 운동 경기의 용어 중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은 쓰지 말아야 할 것, 혹은 순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음식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뎅, 덴뿌라, 스시, 사시미’ 등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도 즐기는 음식이 되었으니 음식 자체를 퇴출시킬 수는 없으니 각각 ‘어묵, 튀김, 초밥, 회’ 등으로 바꿔서 말하도록 권장, 혹은 강요된다.
이중에서 ‘오뎅’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이 말은 일본어 ‘오뎅(おでん)’에서 유래한 것인데 ‘어묵’으로 대체해서 쓰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어의 오뎅과 우리가 어묵으로 부르는 대상은 다르다. 일본어의 오뎅은 어묵, 무, 곤약 등을 넣어 끓인 탕을 가리킨다. 우리가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마보코(かまぼこ)’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그러니 우리가 ‘오뎅탕’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의 뜻대로 하자면 ‘어묵탕탕’이 되어 버린다. 오뎅을 어묵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음식과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돌고 돈다. 맛있는 음식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꼭 필요한 말은 조금씩 변하면서 줄기를 벋어나간다. 규범에서는 ‘어묵’이 이겼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오뎅’이 더 우세하다.
일본어에서 유래한 음식 이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동’과 ‘짬뽕’이다. 각각 일본어 ‘우동(うどん)’과 ‘쟘뽕(ちゃんぽん)’에서 유래한 것인데 ‘우동’은 ‘가락국수’로 바꾸어 쓰도록 강요받고 있으나 ‘짬뽕’은 그러한 강요를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짬뽕과 함께 팔리는 짜장면은 경음이 허용되지 않는 원칙 때문에 ‘자장면’이라고만 써야 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짬뽕은 특혜를 받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동, 짬뽕, 짜장면을 살펴보면 음식의 기원은 물론 이름도 온통 ‘짬뽕’이다. 우동은 일본음식이라고 알고 있지만 본래 중국 음식 ‘훈둔’에서 기원한 것이며 이름도 역시 여기에서 온 것이다. 짬뽕은 중국 음식점에서 팔고 있지만 일본에서 화교에 의해서 개발된 음식이다. 짜장면은 중국의 ‘작장면(炸醬麵)’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우리 땅에서 개발되어 우리만 먹는 음식이다. 음식과 그 이름이 한중일 3국을 회유하는 형국이다. 일본식 이름을 가진 우동이 중국집의 중요 메뉴로 자리 잡고 있는 것, 중국 본토에는 정작 짜장면이 없는 것, 중국을 떠난 중국인이 개발한 짬뽕이 한국에서 다시 중국집으로 들어간 것 모두가 결국은 ‘짬뽕’이다.
‘짱껜뽕’이 ‘가위바위보’로 대체된 것은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짱껜뽕’도 결국은 ‘가위, 바위, 보자기’ 등과 관련이 있지만 뜻도 모르는 요상한 발음보다는 우리말이 훨씬 예쁘고 자연스럽다. ‘묵찌빠’는 어느 사이엔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군국주의의 망령이 깃든 놀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보다 재미있는 놀이가 훨씬 더 많으니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된 것일 뿐이다. 굳이 하지 말라고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묵찌바!’라고 외치며 노는 아이들에게 굳이 군국주의의 망령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는 듯하다.
오뎅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어묵이라고 바꾸어 부른다고 해서 애국심이 고취되는 것도 아니고, 오뎅이라고 한다고 해서 일제 잔재에 매몰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음식과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돌고 돈다. 맛있는 음식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꼭 필요한 말은 조금씩 변하면서 줄기를 뻗어 나간다. 규범에서는 ‘어묵’이 이겼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오뎅’이 더 우세하다. 무엇이 옳은지 당장 승부를 볼 필요는 없다. 역사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역사에 짓눌려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오뎅에서 일제의 냄새를 맡지도 않고, 향수도 느끼지 않는 이들의 단어 목록에서 굳이 오뎅을 지우려 할 이유가 없다. 음식이 맛이 없으면 사라지고, 말의 멋이 없으면 역시 사라진다. 날씨가 스산해지면 ‘어묵탕’보다는 ‘오뎅탕’이 더 먼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