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고립되어 외로움을 느낀다면 심리적으로 우울감이 올 수 있고 이는 질병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영국은 2018년에 외로움부 장관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외로움을 줄이는 일이 의료비와 각종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렇다면 은퇴 후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은퇴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은 아마 ‘건강’일 것이다. 건강해야 뭐라도 할 수 있고, 나와 가족을 지킬 수 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건강이 최고!’를 외친다. ‘충분한 노후 자금’을 드는 이도 있다. 돈이 있어야 자식도 찾아오고 친구와 정담도 나눌 수 있다며 이른 증여와 상속을 극도로 경계한다. ‘적극적인 여가활동’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은퇴 이후의 긴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며 액티브 시니어를 외친다. 이 외에도 각자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을 언급할 것이다.
건강·돈·여가활동! 은퇴생활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필수 자양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건강한 것 같은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 돈은 많은데 불행한 사람, 적극적 여가활동을 추구하는데 한가득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를 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건강한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건강을 즐길 수가 없으며, 돈은 많은데 불행한 사람들은 돈이 화근이 되어 인간관계에 큰 금이 생긴 경우가 많고, 적극적 여가활동을 추구하는데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함께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 즐거움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은퇴생활의 필수 자양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원만한 인간관계’라는 플랫폼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의 인간관계 플랫폼은 다시 3개의 작은 플랫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가족 인간관계 플랫폼’이다. 여기에는 거주를 같이하는 가족은 물론이고 형제나 가까운 친척들까지 포함된다. 둘째는 ‘친구 인간관계 플랫폼’이다. 여기서 친구는 주로 학연·지연·직연(職緣) 등을 통해 맺은 가까운 친구들을 뜻한다. 셋째는 ‘지인 인간관계 플랫폼’이다. 여기서 지인은 친구처럼 가깝지는 않으나 안면이 있거나 가끔 연 락을 주고받는 정도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갈망한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흐뭇한 상태’를 뜻하는 행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연구팀에서 80년 동안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도, 성공도, 명예도 아닌 바로 인간관계라고 한다. 이 결과를 토대로 하버드대 연구팀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음의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 긴밀한 관계일수록 행복을 느끼며 외로움과 고독은 독약과도 같다. 둘째, 얼마나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느냐보다 친밀도와 신뢰도가 높은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다. 셋째, 좋은 관계는 몸과 마음뿐 아니라 두뇌도 보호한다. ‘원만한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럼 3가지 인간관계 플랫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미시간주립대 연구진이 100여 개 국가의 27만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건강과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정’이라고 한다. 즉 ‘친구 인간관계 플랫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우정은 특히 나이가 들수록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0세 이상 노인 1,477명을 10년 동안 추적한 호주의 한 연구에 의하면, 친구관계가 가장 좋은 은퇴자는 그렇지 못한 은퇴자보다 22%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연구팀은 ‘대화할 상대와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은퇴 후 생활이 덜 외롭고, 생물학적 두뇌 활동과 면역체계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네트워크 이론으로 유명한 마크 그래노베터 교수는 친구의 친구와 같은 약한 유대(weak tie)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친한 친구들은 비슷한 경험과 정보를 갖고 있어 일자리 탐색 등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약한 유대 관계에 있는 지인은 친한 친구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과 관계망을 갖고 있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약한 유대는 ‘지인 인간관계 플랫폼’에 해당한다.
필자는 은퇴자를 시간부자라 칭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부족한 것만 못할 수도 있다. 은퇴 이후 늘어난 시간을 마음대로 줄일 수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관계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노력에 따라 바꿀 수 있는 운명이다. 시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흘러갈 때 지겹지 않은 법이다. 인간관계 플랫폼으로 더 나은 은퇴생활에 도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