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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연명치료 거부 권리
보장하는 대만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어떠한 양질의 치료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연명치료가 오히려 환자 자신과 가족의 극심한 고통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삶을 위한 것인가? 만약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인지 짚어봐야 할 문제다. 이번 호에서는 대만에서 올해 새로이 시행하고 있는「환자자주권리법(病人自主權利法, Patient Autonomy Act)」에 대해 살펴본다.

 정현욱 국민건강보험공단 해외통신원

  • 올해부터
    「환자자주권리법」 시행

    대만에서 올해 1월 6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환자자주권리법(病人自主權利法, Patient Autonomy Act)」은 대만과 전통문화와 의료제도가 비슷한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법은 환자가 의료기관과 상의해 ‘사전의료돌봄계획(預立醫療照護諮商, Advanced Care Planning)’을 세우고, ‘사전의료결정(預立醫療決定, Advanced Decision)’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으로 사실상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이 법은 TV 아나운서 출신인 양위신(楊玉欣) 입법위원(한국의 국회의원)이 2015년 5월 「환자자주권리법」을 발의하면서 정식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근위축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아 하반신을 움직이기 힘든 양위신 위원은 평소 환자나 장애인의 존엄 보장에 관한 활동을 해왔다. 그녀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연구해 온 남편 순샤오즈(孫效智) 대만대학교 철학과 교수 등의 도움으로 「환자자주권리법」 입법을 추진했고 대만 사회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기대수명이 80세로 늘어났지만 영구 식물인간이나 중증질환 말기환자 등 연명을 위한 치료를 받는 환자가 증가한 대만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공적으로 논의된 ‘죽음을 맞을 권리’는 적지 않은 울림을 주었다. 결국 「환자자주권리법」은 2015년 12월 대만 입법원을 통과해 2016년 1월 6일 당시 마잉주 총통에 의해 공표되었으며, 3년의 준비 과정을 거친 후 2019년 1월 6일부터 정식 시행에 들어갔다.

  • 안락사 합법화한 아시아 국가는 없다

    이 법의 시행으로 환자는 의료인과 상의를 거쳐 사전에 의료행위 및 돌봄(호스피스 치료)에 관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 환자가 의식이 혼미하거나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관련 계획서를 작성해 서명해두는 것이다.
    단, 「환자자주권리법」은 다섯 가지의 극심한 상태에 처에 있는 환자가 희망하는 경우에 한해서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다섯 가지 상태는 ①말기 환자 ②비가역적 혼수 상태 ③영구 식물인간 상태 ④극중증 치매 환자 ⑤기타 중앙주관기관이 공고한 환자 질병 상태나 통증 고통이 참기 어려운 상태, 또는 질병을 치료할 수 없고 의료 수준으로 적절한 해결방법이 없는 상태에 해당한다. 「환자자주권리법」이 보장하는 바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안락사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안락사 논의조차 터부시 해 온 아시아 국가의 법으로서는 최대한 환자의 결정권을 보장했다고 볼 수 있다.
    서구 선진국들은 안락사나 환자의 치료거부권리에 관해 오래 전부터 활발히 논의해왔고, 네덜란드나 스위스 등은 이미 안락사를 합법화한 반면, 아시아에서 안락사를 합법화한 국가는 아직 단 한 곳도 없다. 안락사가 생명윤리와 충돌하는 것이 주된 이유이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적 장례문화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이 치료 중단이나 안락사에 대한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치료 결정권
    ‘환자 중심’으로 변화

    이 쟁점은 특히 유교문화권에서 첨예한데, 그 국가들 중 하나인 대만은 2000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간 「안녕완화의료조례」를 시행해 오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환자의 치료 거부권을 보장해 온 것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안녕안화조치는 “말기환자에 한해서 연명치료 선택 여부를 환자 또는 그 가족에게 고지해야 하는 것”으로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그에 비해 올해부터 시행되는 「환자자주권리법」은 환자의 치료 결정권을 환자 중심으로 보장하며, 해당 환자의 범위도 다섯 가지로 넓혔다. 또한 가장 큰 개선점으로 ‘사전의료돌봄계획’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이는 환자와 의료 서비스 제공자, 가족 또는 기타 관계자가 환자의 의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소통한다는 점에서 환자의 자주성을 존중한 것이다. 만 20세 이상 혹은 기혼자에 해당되면 사전의료돌봄계획에 기반한 사전의료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 결정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공증인의 공증을 거치거나 또는 현장에서 완전한 행위 능력을 갖춘 2인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 본인이 내린 사전의료결정은 언제라도 서면을 통해 철회나 변경될 수 있다. 의료 선택에 관한 환자의 결정권을 법적으로 정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환자자주권리법 제 4조는 “환자는 의사가 제공하는 의료 사항 중에서 특정 사항을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환자의 가족이나 특별히 친밀한 관계인 사람 등은 의료기관이나 의사가 환자의 의료 선택사항에 의거해 결정한 행위를 막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환자가 택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존중되며, 의사 또한 환자가 선택한 의료행위 결과에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 ‘사전의료돌봄계획’시 환자와
    가족의 충분한 소통 필요

    이처럼 「환자자주권리법」은 환자의 주체적인 결정권 보장 정도를 높이고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따른 고통과 낭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다는 점에서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앞으로 시행 과정에서 직면할 것으로 예상되는 난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 법의 내용이 가족 중심의 전통적인 임종 문화 및 가치관과 대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환자의 법적 의료위임 대리인은 환자를 대신해 임종 의사, 즉 치료 조치 제거나 영양 공급 중단 등을 의료기관에 요구할 수 있지만, 환자 가족의 의사나 심리적 상황과 충돌할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이 법적 쟁의로 번지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사전의료돌봄계획’을 진행할 때 환자는 반드시 가족과 임종에 대한 의사와 가치관에 대해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환자도 본인의 병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밖에 의료기관이 그동안 환자를 대해 왔던 방식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의료진은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알권리를 더욱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타이베이츠지병원 의사인 창여우캉(常佑康) 박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가족이 중증을 앓을 경우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하지만 환자가 본인의 병과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나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 결정을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대만 의료계에서는 의료 공급자가 환자 및 그 가족과 소통할 때 필요한 기술을 향상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부정적 소식을 들은 환자와 그 가족의 정서를 헤아리면서도 그들에게 충분히 병 상태에 대해 설명하려면 의료진에 대한 환자–의사 간 소통 기술이나 생명윤리에 대한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화두
    ‘웰다잉’

    눈부시게 발전한 의료기술은 생명연장이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시킨 축복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가로막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맞고자하는 바람, 이른바 ‘웰다잉’ 문제는 고령화 사회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웃나라 대만이 올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환자자주권리법」은 우리도 충분히 귀 기울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