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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오빠 임하룡의 인생 도전기 “버킷 리스트 실천하느라 늙을 틈도 없다우!”

코미디계의 전설로 통하는 임하룡의 이름에는 ‘젊은 오빠’라는 수식이 아호처럼 붙는다.
일흔의 나이에도 오빠라는 호칭이 찰떡처럼 어울리는 것은 여전히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터.
젊은 오빠 임하룡은 “인생의 시작은 바로 오늘”이라고 외치며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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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웰스엔터테인먼트

중·장년이라면 까만 교복에 빨간 양말을 신은 임하룡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조직폭력배 보스 ‘쉰 옥수수’ 역으로 ‘이 나이에 내가 하리?’, ‘일주일만 젊었어도!’라는 국민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뒤로 빼던 쉰 옥수수 캐릭터와 달리 현실의 임하룡은 ‘이 나이에 나도 한다’고 외치며 언제나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그렇게 데뷔 이후 40년 동안 코미디부터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며 만능 재주꾼으로 사랑받았다. 최근에는 화가로 데뷔하며 개인전도 열었다.

“코미디언으로 데뷔할 때가 서른이었는데, 그땐 스스로 나이가 굉장히 많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보니 이 나이에도 새롭게 시작해도 될 일이 많더라고요.”

인생을 종횡무진하는 임하룡의 행보는 도전을 망설이는 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하나의 희망이 되고 있다.

웃음이 있어 아름다운 인생

“이왕 태어난 인생, 즐겁게 살다 가야죠.” 임하룡은 인생을 소풍에 비유하며 사는 동안 즐겁게 웃으며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웃음은 그에게 직업 이전에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다. 과거에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는 임하룡에게 직업을 바꾸었느냐고 심각하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임하룡은 그 질문에 “팬티를 팔든 잠옷을 팔든 옷 장사는 옷 장사 아닌가?”라고 되물으며 포복절도할 웃음과 함께 큰 깨달음을 주었다.

노안(老顔)을 내세워 얼굴이 삭은 고등학생 ‘해룡이’ 캐릭터를 만들어내더니 노년에 이르러서는 “나이 들어 살이 찌니 주름이 펴져서 회춘했다”며 웃는다. 안구건조증으로 눈물이 나서 고생을 할 때도 “이제 슬픈 역할만 해야 할까 봐”라고 말하며 웃어넘겼다. 그의 웃음 덕에 무겁고 심각하게 흐를 수 있는 일들도 별것 아닌 듯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분야는 달라도 웃음만 있으면 된다’는 임하룡의 철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조언이 된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라는데, 자주 웃다 보면 마지막에도 웃을 수 있지 않겠어요?”

제 건강 비결은 오늘을 사는 겁니다.
‘일주일만 젊었어도!’라고 외쳐봐야 과거가 돌아오지 않거든요.
가장 건강하고 쌩쌩한 오늘을 사세요! 뜨거운 오늘을 살면 언제나 젊습니다.

다이아몬드 스텝이 안겨준 퇴행성 관절염

전성기의 임하룡은 빨간 양말을 신고 다이아몬드 스텝을 신나게 밟았다. 발목을 좌우로 꺾는 트위스트는 흥을 돋우기에 최고였지만, 그 때문에 지금은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 중이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 일반적으로는 나이가 들면서 무릎 관절이 닳지만, 임하룡은 특이하게 발목 관절이 다 닳았다. 발목 때문에 비탈길을 오르기 어려워 등산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20년 넘게 춤을 췄는데, 남들보다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니 틈만 나면 흔들어댔죠. 한창때는 다섯 시간씩 추고 그랬으니까요. 그땐 그게 삶의 전부였죠.”

무릎 관절과 달리 발목 관절은 수술이 쉽지 않아 평지를 골라 다니며 조심하는 상황이다. 지금은 한 번 추면 이틀을 고생하기 때문에 흥이 오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한다.

“수술을 하면 잘 구부러지지 않는 뻗정다리가 된다고 병원에서도 수술을 별로 권하지 않더라고요. 젊은 시절에 춤을 많이 춘 저는 발목 관절이 시원치 않고, 이로 병뚜껑을 잘 따던 친구는 진작부터 틀니를 하고 있답니다. 젊은 날의 영광(!)이 이렇게 몸에 아로새겨지네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앞서 간 친구들도 있고, 아픈 지인도 있다. 부고 소식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이별은 언제나 아쉽고 아프다. 하지만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남은 시간을 더 많이 웃으며 즐겁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소풍 나온 사람처럼 재미있게 놀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애경사의 아이콘이 되다

젊은 오빠답게 세대를 아우르며 소통하는 임하룡은 애경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통한다. ‘프로 참석러’, ‘경조사계의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기로 유명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때 고마운 기억 때문에 경조사를 더 잘 챙기게 됐죠.”

연예계 마당발에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이력 때문에 연락처에 저장된 전화번호만 1만여 개. 그래서 한창때는 하루에 대여섯 개씩 부조금 봉투를 준비하기도 했다. 한번은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절도 하고 조문객들에게 사인까지 해줬는데, 정작 조문해야 하는 상가는 그 옆집이었던 적도 있다.

“하필 부조금 낼 돈이 없던 상황이라 부조금 통을 엎어 다시 받아냈다”며 웃지 못할 해프닝도 들려줬다. 그렇게 주변을 챙기며 살아온 덕에 외아들의 결혼식에 하객 2000여 명이 몰려 식장 일대가 마비되기도 했다. 30분을 기다려 겨우 축의금을 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하객으로 참석한 연예계 관계자가 “가요대상, 연예대상, 영화대상을 한꺼번에 개최한데도 이만큼은 안 될 것 같다”며 놀랐을 정도니 임하룡의 인망이 얼마만큼 두터운지 짐작할 수 있다.

베스트 드레서 임하룡의 패션 처방

임하룡은 개그계의 패션 리더다. 실제로 1988년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교복을 직접 재단하며 입던 솜씨가 연예인이 되며 날개를 단 것이다. 임하룡은 코미디언들도 멋있게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패션에 신경을 썼는데, 당시 옷값 지출만 50만 원으로 출연료인 20만 원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였다. 임하룡이 다음 주에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가 장안의 화제였을 정도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가수 소방차를 상징하는 승마바지도 임하룡의 바지를 본떠 만들었을 정도로 패션 감각이 탁월하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코미디언의 숙명처럼 시대를 앞선 감각이 패션에서도 통한 것이다. 꾸미는 것이 귀찮을 법한 나이임에도 임하룡은 특유의 센스로 여전히 멋스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머리 손질이 귀찮을 때는 모자를 활용하세요. 중절모나 베레모처럼 클래식한 모자도 좋고 복장에 따라 캐주얼한 야구 모자도 좋습니다. 모자는 옷차림에 포인트를 주기에도 좋아요!”

중년 이후 뱃살을 가리기 위해 어두운색 상의를 입고, 흰색처럼 밝은색 상의를 입었을 때는 재킷 같은 겉옷을 챙겨입는단다. 폭이 넓은 넥타이는 배를 가려줘 날씬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는 팁도 전했다.

패션 리더이자 마당발인 임하룡 역시 코로나19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꾸미고 나갈 수도 없고, 여럿이 어울릴 수도 없으니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예요. 힘들 때는 하루에 한 가지라도 웃을 일을 만들어보세요. 웃음이 스며든 일상은 코로나19 백신처럼 여러분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임하룡의 웃음 처방은 코로나19의 터널을 지나는 우리에게 유용한 지침이 된다. 일상이 회복되는 그날, 임하룡의 트위스트로 격하게 맞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