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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 OF SENIOR

마이 버킷리스트

나는야 가수가 된
사랑의 집배원

서울도봉우체국 김용남 집배원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세 번의 기회를 만난다.
그리고 세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려 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모두 제 것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서울도봉우체국 김용남 집배원은 후자에 속한다. 망설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세 번의 기회를 잡은 덕분에 그는 오늘날 사랑과 행복을 전하는 ‘사랑의 집배원’이 되었다.

 이성미 기자   사진 지중근(라운드테이블)

사랑의 집배원 김용남이 간다

“간다 간다 달려간다 선물 전하러 (중략) 오늘도 그대의 징검다리 되어 텅 빈 가슴에 벨을 울리는 나는야 바람 같은 사랑의 집배원.”
주말이면 김용남 집배원은 손에 편지 대신 마이크를 든다. 수천 번 불러 보았을 노래 <사랑의 집배원>의 구성진 가락에 노랫말이 이어지고, 흥이 전염된 듯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어깨를 들썩인다. 집배원 의상을 모티브로 한 무대의상이 조명에 반짝거리고, 김용남 집배원의 얼굴에도 미소가 반짝인다. 매주 주말마다 집배원 가수 김용남의 마술은 계속된다.
“6년 전부터 주말마다 노래 봉사를 하고 있어요. 소외된 이웃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는 것이지요. 일회성 행사도 있고 정기적인 봉사도 있고 이래저래 가는 곳이 많아 매주 한두 군데씩만 찾아도 한 달이 금방 지나요. 그래도 만날 때마다 ‘기다렸다’라며 손을 잡고 맞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지금은 집배원 가수로서 한시도 쉴 틈 없이 살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그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집배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노래 부르는 기쁨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노래를 특출나게 잘하기보다는 흥얼거리는 걸 좋아했죠. 그마저도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좋아하는 일로만 여기고 살았는데, 우연히 참가한 산사음악회에서 1등을 한 후로는 ‘내게 재주가 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기하게 그 후로 무대에 오를 일이 계속 생기면서 노래 봉사를 하게 되었죠.”
그렇게 그는 평일에는 집배원으로, 주말에는 가수로 바쁘게 살아갔다. 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허전함도 커져갔다. 자신만의 대표곡이 없었기 때문. 매일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데에서 오는 갈증은 생각보다 컸다. 문득 집배원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소방관을 위한 노래도 있고 경찰관을 위한 노래도 있는데, 매일 시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전하는 우리 집배원을 위한 노래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평소 알고 지냈던 박주곤 시인에게 집배원을 위한 시 한 편을 부탁했죠. 그리고 그 시를 노랫말 삼아 ‘사랑의 집배원’을 만들었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고 또 응원해 주신 덕분에 집배원 가수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도 얻게 되었고요.”

“지금은 통신수단이
발달하다 보니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전만큼 많지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린
사랑의 집배원이니까요.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집배원은 나의 천직, 노래는 나의 천명

전국 최초 집배원 가수로 공중파에 출연하고 유명세를 얻은 지금 가수로 전업을 욕심낼 만도 한데, 그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집배원은 그에게 천직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 그를 절망으로부터 구해준 것이 바로 집배원이라는 직업이다.
“17살 때부터 기수로 말을 탔어요. 늦둥이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어머님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생선을 파셨거든요. 어머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상경해 한국마사회 기수 후보생으로 입소했어요. 그리고 22살이 될 때까지 기수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죠. 그러다 체중 증가로 기수를 그만두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사업에 투자했다가 크게 손해를 봤어요. 매일 낙담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지요. 하루는 집 밖 계단에 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데, 집배원이 우편함에 편지를 두고 가더라고요. 불현듯 ‘나도 집배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그는 공부에 매진해 당당히 집배원이 되었다. 가난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기수라면, 집배원은 절망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자 두 번째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은 덕분에 그는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행복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편지가 거의 유일한 통신수단이었어요. 사랑이든 감사든 말로는 전하기 힘든 마음을 글로 대신 전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집배원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도 버선발로 뛰쳐나와 반기는 사람도 많았죠. 지금은 통신수단이 발달하다 보니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전만큼 많지 않아요. 저도 사람인지라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요. 그래도 항상 쉬지 않고 시민 곁으로 달려가는 게 제 일이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우린 사랑의 집배원이니까요.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그는 우편물을 배달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마을 어르신들의 안부를 물으며 말동무가 되어드리기도 한다. 평일에는 하루 천 통 이상 우편물을 배달하고, 주말이면 노래 봉사를 하다 보니 힘들 법도 한데, 신기하게 노래를 부르면 힘이 난다고. 우편물을 배달하다가도 노랫말이 떠오르면 멈춰서 메모를 하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어머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담아 <효심>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고생하시는 어머님에 대해 글을 적다가 언젠가 이 글을 노래로 만들어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고생하시는 어머님께 힘이 되고, 또 위로가 되고 싶었죠. 지금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제가 효를 다할 순 없지만, 봉사활동에 나가 어르신들을 대할 때면 못다 한 효를 노래로 대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수로서의 첫 번째 기회와 집배원으로서의 두 번째 기회, 그리고 가수로서의 세 번째 기회까지 모두 잡은 김용남 집배원. 그렇다고 앞으로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준비된 자로 매일 성실하게 하루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꿈은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집배원분들에게 제가 좋은 표본이 되었으면 해요. 전국의 집배원 여러분, 사랑의 집배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세요. 그리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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