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핫 스타

안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변신한
코미디언 김미화
“문화 예술로 시민들과
건강한 삶 일구고 싶어요”

일자 눈썹을 붙이고 “음메 기살아!”를 외치던 순악질 여사가 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돌아왔다.
희극 공연계 거목인 그녀가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으로 시민을 보듬겠다고 나섰다.

강보라

/

사진 박충열

김미화 대표의 삶은 파격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전 국민을 웃게 했던 최고의 코미디언에서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가 된 것이다. ‘코미디언이 무슨 시사 프로그램이냐’는 세간의 염려가 있었지만 눈높이에 맞춘 찰떡 해설로 보란 듯이 성공했다.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귀촌해서 쉬는가 싶더니 사회적 기업인 ‘순악질’을 만들어 지역의 농업과 문화를 엮어가는 활동을 10년 넘게 이어갔다. 그렇게 동네의 문화 후견인으로 자리 잡을 즈음 안산문화재단의 대표이사직에 도전했다. 전형적인 코스를 벗어난 그야말로 김미화만의 마이 웨이다.

‘웃기고 자빠졌네’를 목표로 사는 삶

“원래 틀을 깨는 것을 좋아해요. 대표라면 저래야지, 코미디언은 이래야지.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대중문화 예술계 인물을 공기관의 대표로 임용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스스로도 가장 많이 놀랐고, 세상이 달라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돈을 좇았다면 코디미언 김미화를 유지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다. 하지만 문화 예술인을 지원하고, 시민의 고된 일상에 위로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것이다. 안산을 문화 예술 1번지로 만들겠다는 당찬 계획도 갖고 있다.

“안산은 아픔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그만큼 문화적인 치유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규모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 여러분께 찾아가는 공연을 선보일 계획이에요. 마당극이나 버스킹처럼 가깝고 친밀한 형식을 빌리려고 합니다. 문턱을 낮춰 누구든 오가며 즐길 수 있도록 말이죠.”

일반적으로는 연차가 높을수록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다. 일을 대신할 후배들이 있지만, 어설프게 나섰다가 명예가 실추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일자 눈썹을 붙이고 순악질 여사로 분장을 하고 나선다. 일에서만큼은 언제나 신인이고 현역이다. 문화재단 대표이사에 도전할 때도 그랬다.

“저처럼 알려진 사람이 공고에 응시했다가 떨어지면 그것만큼 창피한 일이 없어요.(웃음) 그렇다고 뒷짐 지고 후배들한테 ‘김 선생님, 존경합니다’ 하는 소리만 들으며 살고 싶지 않거든요. 스스로 물꼬를 트면서 열심히 살아야죠.”

‘웃기고 자빠졌네’는 김미화 대표가 미리 정해둔 본인의 묘비명이다. “코미디언이 그런 소리를 들으면 성공”이라는 우스갯소리도 했지만, 그 덕에 부담 없이 도전하며 웃기고 자빠질 수 있었다. 자빠지면 좀 어떤가. 웃기면 됐지.

장애를 가진 가족이 있으면 불행할 것이라 짐작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아들 덕분에 웃습니다. 물론 가슴이 시릴 때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일상의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수유리가 낳은 스타, 명랑 소녀 김미화

김미화 대표는 데뷔 전부터 동네의 슈퍼스타였다. “미화야, 노래 한번 해봐라”라는 어른들의 요청이 오면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흉내 내 1원도 받고 눈깔사탕도 받았다.

“피곤하고 고단한 시대였죠. 어른들이 제 재롱을 보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던 거예요.”

가난한 동네에서도 가장 후미진 반지하 방에서 살았지만, 어린 미화는 주눅 들지 않았다. 보따리 옷 장사를 하느라 며칠씩 집을 비우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 병 수발을 도맡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곧잘 어울렸다. 밖에 나갈 때는 주전자에 거즈를 담가 아버지의 입가에 물려드렸다. 환자의 입이 마르지 않게 해놓고 오래 놀고 오려는 대단한 잔머리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좀처럼 굴하지 않는 모태 긍정이다. 아홉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해장국집을 열었을 때도 그랬다.

“한번은 지나가던 담임 선생님을 붙잡고 엄마 해장국집으로 이끌었어요. ‘우리 엄마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데 장한 어머니상 좀 주세요’ 했다니까요. 그래서 진짜 장한 어머니상도 받았어요.(웃음)”

코미디언을 반대하던 어머니는 딸이 순악질 여사로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일자 눈썹을 좀 더 진하게 그리라”라는 주문을 했다니 그녀의 유머와 긍정은 내림인가 보다.

김미화가 말하는 재혼 부부의 세계

이혼의 아픔을 딛고 2007년 윤승호 교수와 결혼한 김미화 대표는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혼 장려 같아서 머뭇거리게 되지만(웃음) 딸들에게도 얘기해요. 결혼은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혹시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요.”

김미화 대표는 밖에서는 행복했지만 집에서는 행복하지 않아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모든 것이 시간 싸움인데 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노년에 기댈 수 있는 남편과 함께인 지금은 정말 행복하다. 아이들 앞에서는 강해지기 위해 마음을 다잡지만, 남편 앞에서는 속 터놓고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어 좋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떠밀리듯 물러나게 됐을 때 남편 윤승호 교수는 “부인은 큰 파도인데, 큰 파도가 잔파도한테 밀리는 법”이라며 위로를 건넸다. 아내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낮아지라는 현명한 충고였다. 부박한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다.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는 결혼은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라도 축복이다.

발달장애 아들의 건강한 삶을 응원하다

김미화 대표는 윤승호 교수와 결혼하면서 발달장애 아들 윤진희 씨의 엄마가 됐다. 그녀는 결혼 이후 장애 아들을 스스럼없이 오픈했다.

“아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존재를 부정하거나 장애 사실을 숨긴다면 아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프겠어요. 사람들이 발달장애가 있으면 감정도 없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는 똑같은 사람이에요. 김미화가 아니라 아들의 삶을 존중하기 위해서 모두에게 오픈했죠.”

김미화 대표는 아들 덕분에 오히려 웃을 일이 늘었다고 말한다. 새엄마는 부자(!)라고 세뇌시킨 덕분에 엄마 말이라면 뭐든 잘 듣고, 맥주 한 캔을 사기 위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서 모두를 웃게 만든다.

김미화 대표의 건강 비결은 이 같은 ‘긍정’이다. 안달복달하기보다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 덕에 산전수전에 공중전을 겪으면서도 몸 상하지 않고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건강보험 혜택을 체감하느냐는 질문에는 가족 이야기부터 꺼낸다.

“아흔이 넘은 시어머니부터 발달장애 아들, 20대인 두 딸까지 두루 혜택을 보고 있어요. 시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시고, 아들은 장애가 있으니 그렇다고 해도 쌩쌩한 20대에게도 건강검진 통지서가 와서 깜짝 놀랐어요.”

미국에서 유학한 두 딸이 병원 때문에 고생을 해 더 크게 체감되는 부분이다.

“미국은 병원비가 살인적이라 학교에서 지원되는 것 외에 병원은 꿈도 못 꿨죠. 딸아이가 축농증이 있었는데도 병원을 못 갔다니까요.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수준과 비용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해도 좋습니다.”

2021년, 공연계의 해피 바이러스를 기대해도 좋다. 김미화 대표이기에 능히 가능한 일이다.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기꺼이 ‘웃기고 자빠질’ 그녀의 활동에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