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핫 스타

전통, 그 명맥을 잇는 한복 장인 박술녀 “100년 입을 옷을 짓는 사람에게 시니어란 전성기겠지요”

한복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한복 장인 박술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최고의 한복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복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박술녀는 오늘도 한복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마다하지 않고 짐을 챙긴다.

강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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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대원

한복 장인 박술녀1
“ 한복을 알리는 데 자부심보다는 의무감이 있어요.
우리 옷 알리는 자리가 있다면 언제든 어디든
성심껏 성의껏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한복을 알리는 일은 명예로운 의무감

박술녀를 찾아간 날엔 공교롭게도 가을을 재촉하는 굵은 비가 내렸다. 하늘은 흐렸고, 날은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길에는 오가는 사람마저 드물었다. 궂은 날씨에도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간 박술녀의 한복연구원에는 귀한 손님이 와 있었다. 멀리 미국에서 한복을 맞추기 위해 찾아온 젊은 외국 손님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생경한 느낌이었다. 한국 사람도 평생 몇 번 입을까 말까 한 옷이 아니던가. 박술녀는 멀리서 찾아온 외국 손님에게 정성을 다했다. 색색의 고운 비단을 꺼내 보여주며 잘 어울리는 색을 찾아주었다. 한복을 다 맞춘 후에는 외국 손님에게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세심하게 물어보며 저녁 식사까지 대접할 참이었다.
“시간이 끼니때잖아요. 어떻게 그냥 보내요. 내 집에 온 손님인데. 그게 누구라도 때가 되면 챙겨야지, 난 그냥은 못 보내요. 그런 거 못 봐요. 따뜻한 차 한잔이라도 대접해야지. 하물며 멀리 외국에서 한복을 짓겠다고 찾아온 분이잖아요.
이럴 때면 한복 짓는 사람이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 심정이 돼요. 허투루 못 하겠어요” 외교부 장관 표창까지 받았으니 민간 외교관이 맞다. 한복 디자이너로 살다 보면 소위 나랏일에 참여해야 할 때도 많다. 우리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가진 거라곤 꿈뿐이었다

박술녀는 한복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중동이든 남미든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의무감이나 자부심이 궁금했다.
“정확하게 짚었어요. 자부심보다는 의무감이 있어요. 한복을 알리는 일에 대한 사명감. 그래서 우리 옷 알리는 자리가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언제든 성심껏 성의껏 최선을 다하려 해요. 그것이 비록 명예뿐이라 해도요. 물론 힘든 일이에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우리 옷을 알리는 일이라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술녀는 한복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손꼽힌다. 역시 한복을 알리는 일에 대한 그녀의 사명감은 단단했다.
말을 이어가는 데 주저함이 없고 힘이 있다. 그만큼 일을 대하는 마음이 순수하다는 뜻일 터. 얼마 전 한 종편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금 박술녀의 인생을 재조명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을 딛고 한복 디자이너로 성공하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충남 서천의 작은 마을에서 7남매 중 셋째로 자란 그녀는 유년 시절을 무척 가난하게 보냈다. 그런 그녀에게 한복에 대한 꿈을 키워준 이도, 한복 짓는 재능을 물려준 이도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 옷 지어드렸을 때 가장 기뻐

“우리 어머니가 한복을 참 좋아하셨어요. 어려운 시절에도 외출할 일이 있으면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곤 하셨죠. 나이가 들어서도 외국 여행을 가실 때면 꼭 한복을 입었고, 거동이 불편해지셔도 늘 한복을 입으셨어요. 내가 한복을 짓겠다고 했을 때도…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한복은 영원한 것이라며 응원해주셨어요.”
박술녀의 어머니는 한복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섬세한 성격에 바느질 솜씨도 좋았다. 낡은 옷이라도 허투루 다루지 않고 단정한 바느질로 깨끗하게 수선해 입었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를 꼭 닮았다. 그래서일까. 국내외 정상급 스타의 한복을 모두 만들어 입힌 그녀이지만 한복 짓길 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은 바로 어머니의 한복을 지어드릴 때였다.
“어머니 팔순 잔치 때 어머니뿐 아니라 온 집안 식구의 한복을 새로 지어 입혔어요. 언제 한복 짓기를 잘했다고 느끼는지 물었죠? 순간순간 보람된 일이 많았지만 어머니의 팔순 잔치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내 한복을 입은 가족들을 본다는 건, 아마도 나만 알 수 있는 감정일 거예요.”
가족들의 반응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반응은 무슨 반응. 그냥 내가 입으라니 입은 거겠지” 하며 웃는다. 한복 꾸밈의 대가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꾸밈없이 담백하다.

이제는 건강 챙기며 살려 해

한복 만드는 사람들은 직업병이 없을 수가 없다. 평생 바느질을 해온 그녀는 모 건강 프로그램에 출연해 “날이 찌뿌둥하면 무릎이나 어깨가 뻐근하고 온 삭신이 아프다”고 고백하며 세포 하나하나가 아픈 느낌을 겪는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지만 40대 후반 갑상선암에 걸려 치료를 받기도 했다. 현재는 완치되었지만, 그 후 건강관리는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 되었다.
“갑상선암 치료받고 정기적으로 검진받고 하죠. 하지만 아직도 병원과 그렇게 친한 성격은 못돼요.(웃음) 건강한 체질로 태어났지만 일하면서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 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운동도 열심히 하고, 한 끼를 먹어도 건강하게 챙겨 먹으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예상하지 못했던 병에 걸리고, 치료하면서 느낀 게 많았다고 했다. 건강은 결국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운동도 식이요법도 열심히 하고 있다. 마시는 차 하나 허투루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파서 병원에 다녀보니 건강보험 혜택을 얼마나 보는지 실감하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오래도록 옷을 지으려면 더 건강해져야 할 것 같아요. 바느질을 놓을 수는 없어요.”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분이라서일까. 한 마디 허투루 하는 말이 없다. 그런 고집과 집념, 열정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것이리라. 100년 갈 옷을 짓는 이에게 시니어란 전성기를 뜻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진정 시니어 핫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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