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소확행

우리들의 소하지만
실한

일상을 소소한 행복으로 채워주고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띠게 하는 <건강보험> 독자들의 '소확행'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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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 그리고 가을 길

이영주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그래서 올가을이 기대된다. 이유는 영혼을 맑게 하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계절이고, 또 넓은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속에 시원한 생명수가 흐르듯 편안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길,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하늘 아래로 비치는 햇살을 맞으며 인생의 깊은 고뇌에 빠져보는 그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모른다.

가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갈등, 그리고 사색으로 모든 마음을 교란시키면서도 운치 있게 만들어주기에 더욱더 좋다. 투명한 햇살 아래 살비아 꽃잎도 아름답고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고추 잠자리의 자유분방함을 보노라면 너무나 부러운 마음이 든다. 인생이 정녕 가을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가끔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 기분도 좋아! 바로 이런 게 행복이 아닐까!”

꿈 많은 여고 시절, 길가에 핀 가느다란 코스모스가 살랑거리는 바람에 손을 흔드는 듯한 모습이 좋았다. 여름의 끝자락에는 키가 큰 해바라기가 활짝 웃고 있다. 다가올 가을을 생각하자면 그 일렁거림으로 나의 감정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도 아름다운 행복이 아닐까?

나의 재능기부

이상기

‘재능기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재능기부는 뭐 아무나 하나? 그럴싸한 능력이 있어야 기부도 하는 거지. 우리 같은 서민들이야 그저 정성을 다해 모금함에 기부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단 걸 깨닫게 되는 날이 찾아왔다.

얼마 전 사내 봉사단원들과 함께 어르신들이 계시는 요양병동을 방문했다. 온종일 침대생활을 하며, 그저 TV를 벗 삼아 지내다 주말에 찾아올 가족들만 기다린다는 그분들을 위해 손주뻘 되는 단원들이 콩트와 노래 공연을 준비했다.

오후가 되자 지역 내 미용사분들께서 이발 봉사를 오셨다. 어르신들께서 이발을 끝내시면 목욕은 우리 역할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미용사분들의 손이 부족하다 보니 시간이 자꾸만 지체되었다.

“할머님들 펌하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큰일이네요. 할아버님들이야 짧고 단정하게 커트만 하면 되는데.”

그 순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저… 제가 군대 있을 때 이발병을 했는데요.”

“잘됐네요. 그럼 할아버님 몇 분만 대신 맡아주시겠어요?”

“근데 제가 딱 1년 정도만 한 거라서요. 그리고 이발기를 다룬 지도 오래되었고.”

“제가 곁에서 봐드릴 테니까 한번 해보세요.”

“잘할 수 있을까요?”

기다리시던 어르신들께서 난감해하는 나를 괜찮다며 다독여주신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손에는 이발기를, 다른 한 손에는 빗을 든다.

“어르신, 길이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네네, 그럼 옆이랑 뒷머리는 깔끔하게 층을 내서 올릴게요.”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이발기로 길이를 조절하며 다듬은 후, 미용가위로 정리를 한다.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들다마다!”

할아버님의 한마디에 그제야 온몸에 긴장이 풀린다. 미용사분께서도 괜찮은 실력이라며 한껏 치켜세워주신다.

네 분의 어르신께 이발을 해드리고 돌아오던 길.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군대 시절엔 포상 휴가도 없고, 누구 하나 고마워하지 않는다며 그렇게도 배우기 싫었던 이발 기술을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쓸 수 있다니. 당시엔 ‘왜 하필 우리 중대에서 내가 이발병을 맡아야 하냐’며 화도 내고 투정도 많이 부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서툰 실력의 나를 믿고 이발을 맡긴 중대원들과 어르신들께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자네, 이발 기술은 언제 배운 거야? 덕분에 오늘 재능기부 제대로 뽐내는구만.”

“감사합니다.”

‘그래. 재능기부가 따로 있나? 완벽하진 않아도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게 어디야.’

어쩌다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오늘, 나 스스로가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주말엔 본가에 들러 아버지도 이발을 해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