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만남

칸의 여왕이 보여준
또 다른 행보
전도연

‘전도연’ 그 이름만으로도 대중은 알고 있다. 믿고 보는 연기와 계속되는 변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에도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무려 27년 만에 대형 스크린이 아닌 연극 무대에 올랐다. ‘전도연이 전도연 했다’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번에도 배우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당연했고,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음에 관객들은 환호했다. 1990년 CF <존슨 앤 존슨>으로 데뷔해 30여 년이 넘도록 쉼 없이 연기해온 천상 배우 전도연. 그에게 요즘의 일상 그리고 작품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물어보았다.

  남혜연 사진 매니지먼트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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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불가 배우’ ‘칸의 여왕’ ‘믿고 보는 연기’ 등 그야말로 화려한 수식어는 배우 전도연이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전도연은 그런 믿음에 다시금 화답했다. 본인의 진가를 또 한 번 발휘하기 위해 1997년 <리타 길들이기> 이후 27년 만에 <벚꽃동산>으로 연극 무대 위에 섰다.

“내가 무대 위에서 해야 할 것에 더 집중했어요. 나중에 <벚꽃동산>이 회자되고 좋은 반응을 얻으면 내가 선택을 잘했구나 하면서 우쭐할 수도 있으니까요, ‘전도연이 연기를 잘한다’는 건 너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전도연이 너무 잘하더라’보다는 ‘전도연이 선택한 좋은 작품’이라는 믿음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연극 <벚꽃동산>은)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연극 <벚꽃동산>은 회사의 경영 악화로 저택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알코올 중독자 도영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작품. 세계적인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안톤 체호프의 고전을 재해석해 극의 배경을 120년 전 러시아에서 2024년 서울로 옮겼다.

대한민국 공연이 끝나지 않았음을

무엇보다 이번 무대가 의미 있던 건 소극장 ‘학전’이 막을 내린 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1년부터 33년간 한국 연극문화의 산실로 활약했던 소극장 학전이 지난 3월 15일 문을 닫았다. 1991년 3월 15일, 대학로에 소극장을 개관하면서 출발한 학전은 그동안 한국 대중문화사에 크고 작은 궤적을 만들어왔다. 황정민, 설경구, 장현성,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이종혁, 배해선, 김대명 등 배우부터 고(故) 김광석, 박학기, 여행스케치, 권진원 등 뮤지션까지 ‘학전’을 통해 성장했다.

공교롭게도 전도연이 다시 연극 무대에 돌아온 사이, 학전은 문을 닫았다. 많은 배우 그리고 관계자들이 안타까워한 가운데 전도연의 연극 도전은 대한민국 공연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27년 만의 연극 무대라는 것도 기사를 통해 알았어요. 그때는 내가 어떻게 무대에서 연기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이런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해온 것 같아요. 매체 영화나 방송이나 장르적인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는 것을요.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긴 하지만 장르적으로 넓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안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고민했죠. 그런 면에서 연극은 멀게 느껴졌는데, <벚꽃동산>을 하면서 내가 지금껏 느껴온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를 받는 무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의 유작으로,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재해석한 버전을 보여줬다. 전도연은 원작의 여주인공 류바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캐릭터로, 10여 년 전 아들을 잃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에 돌아와 고군분투하는 송도영 역을 연기했다. 전도연은 연출가 사이먼 스톤을 보고 <벚꽃동산> 출연을 결정했지만, 동시에 사이먼 스톤 때문에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사이먼을 너무 사랑하고 다른 작품을 하자고 하면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이먼의 작업 방식이 나에게는 너무 생소해서 적응하고 믿음을 가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죠. 대본도 늦게 쓰고, 쪽대본을 주니까 너무 불안했고 도망가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첫 연습 당일에 15장짜리 쪽대본을 받았는데 너무 당황 스러웠어요. 이걸 갖고 리딩을 한다는 게 의심스러워서 컴플레인을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원고를 다 보고 그가 보여준 연출 방식을 보니 신뢰가 갔죠. 물론 연습 과정은 배우로서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느낀 신선함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일상에도 충실한 사람 전도연

전도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이 무대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 공개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무대 위에 선 만큼,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솔직히 말하면 난 변화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며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일상에서도 작은 변화 하나로 큰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렇다고 안주하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시대라고 하면 제가 아이 엄마이기도 하니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어야 할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이 살기 바라지 않나요? 저는 그래요. 생활인으로도 열심히 잘 살고 있어요. 엄마로서, 생활인으로서. 물론 아이와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하지만 아이가 충분히 내 직업을 이해하고 응원해주고 있어요. 일하는 시간 외에는 생활에 충실히 살고 있죠.”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워낙 사생활과 일이 철저하게 분리된 배우이기도 했고,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전도연’이라는 이름이 확실히 각인됐기 때문인지 좀처럼 가족이나 또 다른 얘기들이 나오지 않았었다. 그랬던 전도연이 스스로 2009년생의 딸을 언급해 눈길을 모았다.

“제가 좀 철이 없어서 (연극 속 딸처럼) 딸도 철이 일찍 들었어요.(웃음) 친구같이 지내고 있어요. 딸이 프리뷰 공연을 보러 왔죠. 제가 술을 마시거나 술 취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송도영에게 ‘엄마의 모습도 있다’라면서 즐겁게 봤더라고요.(웃음)”

영화 <리볼버>에서 보여준 또 다른 모습

연극 무대로만 그쳤다면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벚꽃동산>이 막을 내리자마자 전도연은 또 달렸다. 예상된 일이긴 하지만, 쉼 없는 연기 열정에 모두 또다시 배우 전도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좋아했다. 이번에는 영화 <리볼버>(오승욱 감독)이다. 8월 7일 개봉 예정인 영화 <리볼버>는 큰 대가를 약속받고 경찰 조직의 비리를 혼자 뒤집어쓴 형사 수영(전도연 분)이 2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수영의 옥살이를 보상해준다던 투자회사의 실세 앤디(지창욱 분)는 약속을 저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수영은 분노의 질주에 나선다. 수영의 조력자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인물 윤선(임지연 분)이 수영의 주변을 맴돌면서 미스터리를 더한다. 전도연은 분노가 응축된 수영을 독기 서린 차가운 얼굴로 스크린에 그려낸다.

<리볼버>를 연출한 오승욱 감독은 “지금까지 전도연 배우가 보여주지 않은 얼굴을 꼭 표현하고 싶었다. 마지막 편집을 끝내면서 ‘해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계속 무표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전도연 배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전도연의 노력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 “전도연 배우는 그만의 품격과 품위가 있고, 더 중요한 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뛰어나단 점이다. 이를 시나리오의 밑바탕에 깔아놓고 이야기를 만들었다”며 배우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또한 후배 임지연과 지창욱 역시 “전도연 선배님과 함께 연기할 수 있어 더욱 값진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무뢰한> 이후 오승욱 감독님의 작품을 사랑하게 됐어요. 근데 감독님이 글 쓰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죠. 저도 작품적으로 고팠어서 블록버스터를 준비하시길래 그사이에 저예산 영화 한 편 하자고 제안드렸는데 4년이나 걸렸어요. 안 되겠다 싶었죠. 어느 순간 너무 닦달하는 것 같아 전화를 안 드리기도 했어요. <길복순> 훨씬 전부터 이야기를 나눈 작품이에요. <리볼버>라는 작품을 보니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 <무뢰한>을 할 때는 저도 각이 서 있었고 감독님도 예민한 지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꼭 해야 될 생각만 하면서 연기를 했어요. 마음 편하게 촬영했어요. 여태까지 이런 모습, 이런 감정으로 연기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어.’ 그 말이 굉장히 통쾌했죠. 극장으로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 와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