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배우는 없었다. 능청스럽고 친근한 연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동네 아저씨 같은데, 대형 화면에서 날 선 눈빛으로 응시하는 것을 보자면 세상에 없는 인물 같다. 코믹과 스릴러 그리고 사극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기 때문일까.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듯하지만, 누구보다 친근하고 믿고 보는 배우로 꼽힌다.
글 남혜연 사진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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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은 최근 보폭을 넓혀 OTT에서도 주목받는, 아니 선택받는 배우가 됐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폭 넓은 스펙트럼으로 연기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류승룡 하면 또 하나 ‘닭 전문 배우’라는 애칭도 빼놓을 수 없다. 천만 흥행을 이룬 <극한직업>, 그리고 지난해 디즈니+에서 대히트를 친 <무빙>에서 류승룡은 신나게(?) 닭을 튀기며 열연했다. 여기에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에선 제목부터 <닭강정>이란 작품에 출연했으니 이 정도면 ‘닭 홍보대사’로 손색없다.
닭 전문 배우 류승룡
배우 류승룡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닭 모양의 작은 가방을 들고 닭 모양의 액세서리를 재킷에 달았다. 심지어 한손에는 훈제란까지 들고 있었다. 전부 <닭강정>이라는 작품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닭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한참 쏟아내더니, 마지막엔 최근 치킨 브랜드의 모델로 발탁됐다며 해맑게 웃었다.
류승룡과 안재홍 주연의 <닭강정>은 의문의 기계에 들어갔다가 닭강정으로 변한 딸 민아(김유정 분)를 되돌리기 위한 아빠 선만(류승룡 분)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백중(안재홍 분)의 신계(鷄)념 코믹미스터리 추적극. 공개 이후 원작 웹툰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했다며 큰 호응을 얻었다.
먼저 류승룡은 “닭은 머니 푸드다. 그만큼 소비가 많고, 그래서 소재가 계속 나오니까 작품에도 계속 많이 등장하고. 이젠 삼계탕이 남은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더니 “항상 우리 옆에 있고 몸이 허할때나 아플 때 가장 먼저 떠오른다. 월드컵 때도 닭은 우리 곁을 지켰다. 그래서 밀접하고 친밀하고 이로운 홍익인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닭이 없었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았을까”라며 닭 예찬론을 이어갔다.
사실 <닭강정>은 캐스팅이 발표된 직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코믹 연기의 대가를 넘어 종종 사랑스러움의 대명사가 되는 류승룡과 안재홍이 만났고, 여기에 재기발랄한 연출로 유명한 이병헌 감독이 함께한다니까. 시작하기 전부터 부담을 느꼈을 법도 하다.
“분명히 취향을 타는 작품이겠다 싶었죠. 저는 극호지만. 원래 제가 고수를 못 먹었는데 용기를 내서 고수를 먹다 보니까 이젠 그맛을 즐기게 됐거든요. 맛있는 데다 지방을 제거하고 소화를 돕는 효능이 있다니 훌륭하죠. <닭강정>도 그런 것 같아요. 이상할 수 있지만 진입장벽을 넘으면 중독성이 있는, 생각 없이 웃으면서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디톡스되는 부분이 있죠.”
<닭강정>은 재기발랄함을 넘어 과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류승룡 역시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잉?’ 하며 의문을 느꼈단다. 한 줄 로그라인을 듣고 이병헌 감독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지만, 결국 현실로 구현됐다. 충격의 대본이었지만 읽다 보니 재미있었다. 특이한 소재를 전면에 배치한 뒤 하나하나 풀어가는 스토리 방식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울린 가장 큰 요인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족 이야기와 인류애였다.
“정말 즐겁게 찍었죠. 배우 인생에 있어서 이런 작품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설정 말고는 굉장히 리얼하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연기 톤이나 대사 양식은 판타지라고 인지하시고 <닭강정> 언어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만약에 이 전부가 실제라면, 예를 들어 말하는 대로 변신시켜주는 기계에 들어간다면, 저는 우리 아들 이름을 외쳤을 것 같아요. 둘째가 고1인데, 걔가 되면 진짜 편할 것 같거든요.(웃음) 친구 같은 아빠가 이야기 다 들어주고…. 아이들 반응이요? 병맛이라면서 재밌다고 해줬죠. 그거면 충분하죠!”
얼마 전 라디오에서 ‘환갑 때까지 코미디를 못 하겠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럴 생각일까. 물론 좋은 작품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그이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다. 들어보니 <닭강정>에 대한 애정 지수가 현재 너무 높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안 할 거예요~ 그만큼 <닭강정>에 대한 애정이 크고 이런 독특한 장르가 제 배우 인생에 또 있을까 싶어서요.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인데. <지구를 지켜라>, <킬링 로맨스> 계보가 있는데 저는 두 작품 모두 극호였어요. 아무튼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은 한동안 쉬고 있다가 많은 분이 ‘류승룡이 웃기는 거 보고 싶다’고 할 때 짠 나타나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코미디 장르 한 작품이 더 있는데 그 것도 올해 공개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닭강정>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쉬어야겠어요. 보고 싶을 때까지.(웃음)”
류승룡에게 안재홍이란? 그리고 딸 김유정
류승룡은 작품에서 같이 호흡한 배우 안재홍부터 딸 역할의 김유정까지 동료들의 자랑을 한참 늘어놨다. 급기야 <극한직업>의 배우들 이름까지 거론됐다. 류승룡은 작품으로 인연을 맺은 배우들과 관계가 좋기로 유명하다. 또 쉬는 날에는 제주도로 훌쩍 내려가 자연을 만끽하기도 하고, 취미인 목공을 즐기고, 가족과 캠핑을 하는 등 삶을 충실하게 채우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이것들이 류승룡이 지치지 않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쉼도 중요한 것 같아요. 많은 시간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보내는지. 아이들과의 시간, 동료들과의 추억, 아내와 함께 하는 운동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있을까요? 건강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평화롭기 위해, 삶을 더 즐겁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그것이 연기이든 취미 생활이든 간에요. 가족과 주변의 지인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고 있어요. 이것이 저의 건강 비결이기도 하고, 꾸준하게 연기에 매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죠.”
류승룡은 다정하다. 무엇보다 모든 것에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가족 얘기에 한없이 웃었고, 안재홍의 이름만 나왔을 뿐인데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아까부터 너무너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참느라 힘들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배우 안재홍은 곰인 척하는 여우 같아요. 센서나 세포가 열려 있는 배우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 여러 모습들을 보여줬는데, 앞으로가 훨씬 더 기대되는 배우예요. 저보다 16살 어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도 하고 결혼하고 아기도 낳으면서 변화하며 맡게 될 작품이 너무 기대가 되죠. 지금은 그 나이 또래에 할 수 있는 모든 캐릭터나 장르를 다 섭렵했으니까요.”
또한 실제 딸은 없지만 안재홍이 사윗감으로 어떻겠냐고 묻자 “너무 좋다. 장인과 티키타카도 좋고, 순정파이지 않나. 재밌고 책임감 있다. 때론 양질의 건강한 진지함도 있다.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윗감 얘기가 나오니 극 중 딸 역할을 맡았던 김유정에 대한 얘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김유정 배우는 저와 활동 연도가 거의 비슷해요. 잘 성장해서 좋은 배우로 만나게 돼 너무 좋았죠. 순간 몰입력도 좋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커서 재밌게 프로답게 하더라고요.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딸처럼 대할 수 있었죠. 김유정 배우가 영혼을 갈아 넣었기 때문에 민아로 보일 수 있었고요.”
류승룡 하면 다양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앞에 언급된 작품 외에도 K-좀비를 알렸던 <킹덤> 그리고 사극 <명량>과 <광해, 왕이 된 남자>까지 류승룡의 작품은 마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는 클래식, 인디밴드 등 음악에도 여러 가지 기호가 있어요. 작품으론 정통 사극도 좋아하고요. 독특한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 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기발한 무언가에 끌린다고 해야 할까요? 클래식한 작품을 찍어뒀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악역도 하고 싶고 다 가능성을 열어두죠. 이 작품을 놓치면 영영 못 할 것 같은 독특한 작품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엔 그게 <닭강정>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류승룡에게 배우 인생에서 현재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류승룡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매우 진중하게,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기를 좋아하는지를 한껏 표현했다.
“아무도 모르죠. 배우는 항상 대중의 선택을 받는 사람이니까요. 참 쉽지 않은데, 그래서 휴식을 가지려고 해요. 코미디가 많이 칠해졌으면 지우고 하얀 도화지로 만들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디 한쪽으로 국한되지 않게. 그렇게 선택되어지는 배우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