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만남

40여 년간
멈추지 않은 것이 나의 에너지
배우 김희애

배우 김희애가 2024년에도 열일 행보를 이어간다. 이미 개봉한 <데드맨> 외에도 차기작 두 편이 대기 중이다. 작품의 성격도 모두 다르다. <데드맨>에서 불꽃 카리스마를 펼쳤다면, 또 다른 개봉작인 영화 <보통의 가족>에선 미묘한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할 예정이다. 지난해 넷플릭스 <퀸메이커>로 전 세계 팬들을 만난 그는 올해도 넷플릭스 <돌풍>을 통해 또다시 출중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남혜연 사진 콘텐츠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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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영화 <스무해 첫째날>로 데뷔, 4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배우로 살아온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그저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직업이든 허들이 있지만 그때그때 잘 넘어가면 오래 할 수 있더라. 오래 하는 게 강한 것이다. 그래서 커리어를 멈추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어려웠지만 다시 하기 어려울 멋진 역할

영화 속 김희애는 강렬했다. 바늘로 찔렀을 때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데드맨>은 이름을 사고파는 ‘바지사장’ 세계를 소재로 한 범죄 추적극. 김희애가 맡은 역할은 레전드 정치 컨설턴트 심 여사 역할이다. 극 중 횡령 누명과 함께 죽은 자가 돼 중국의 사설 감옥에 끌려간 만재(조진웅 분)을 극적으로 구한다.

“심 여사 같은 도드라지는 역할을 맡을 기회는 흔치 않아요. 물론 그 전에 시나리오 자체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선택했어요. 아무리 좋은 역할이어도 이야기가 별로면 출연하지 않아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강렬한 캐릭터까지, 거절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었죠. 또 ‘바지사장’이란 말만 들어봤지 이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고, 이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벌어지는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굉장히 흥미로우면서 섬뜩했고요. 금세 빠져들었어요. 배우에겐 새로운 걸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니까요. 좋은 시도였던 것 같아요. 어려웠고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도 물론 있지만 반성하면서 성장하는 거니까.”

어느덧 촬영장에서 김희애는 ‘대선배님’으로 통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것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도 그의 몫이 되어버린 듯했다. 그는 연기를 할 때만큼은 더 완벽하게 집중하고, 감독과의 소통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이번 <데드맨> 촬영장은 배우 김희애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먼저 그는 이번 영화로 첫 연출에 도전한 하준원 감독에 대해 “감독님이 정말 화 한 번 안 내고 선하고 따뜻하면서도 우직하다. 팬데믹 이후 어려운 상황이 닥치고 변수가 터져 나와도 유연하고도 우직하게 이끌어가더라. 역시 캡틴은 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그 인내심이 인상적이었다”며 무한 신뢰를 보였다.

“사람 좋은 조진웅 배우를 비롯해 열정이 가득한 현장이었죠. 매번 어린 친구들과 연기하면 새로움과 놀라움을 느껴요. 세월이 주는 내공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랄까요. 완전히 다른 시스템에서 장벽 없는 자유로움 속에서 자란 세대는 확실히 다르고, 그들의 연기도 에너지도 다르더라고요. 그 새로움, 어떤 신선함에 늘 자극을 받고 그래서 서로 컬래버를 이루면 다채로운 호흡이 보여지는 것 같아 굉장히 즐거웠어요.”

매일 아침 영어 공부와 운동,
이렇게 사는 게 행복

아마도 사람 김희애보다 배우 김희애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을 것 같다. 연기를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부으며 노력하는 일상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기에 배우 김희애의 하루는 늘 꽉 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치열함 속에서 김희애는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게 뭐야?” 혹은 “정말 대단하다!”고 탄성을 지를 것만 같은 알찬(?) 루틴이다. 김희애는 매일 새벽 EBS영어 방송을 듣고, 운동을 하는 게 자신의 일상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건 아니에요. 자기가 행복한 대로 하면 되잖아요. 저는 행복해서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3년만 해보자’ 싶어서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나니 오히려 더 못하게 됐어요. 그러면 이제는 10년 해야겠다 싶어요.(웃음) 한 스텝 앞으로 가면 두 스텝 뒤로 가게 되는데, 그래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놀면 뭐 해요. 대사를 외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억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영어 공부를 할 때마다 ‘난 이런 것도 모르네. 공부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그의 삶은 모든 것이 ‘연기’에 맞춰진 것 같았다. 그만큼 좋아하고, 사랑하며, 가장 잘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더 노력하게 되고, 더 잘하기 위해 또 다른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다. 촬영 전에는 대사를 까먹을까 봐 사담을 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라는 것. 그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싸하다’며 오해할 수 있지만, 김희애는 그만의 방식으로 답했다. 순간에 집중해서 완벽하게 해야 그게 민폐를 안 끼치는 일이라고 말이다.

“완벽한 루틴을 지키며 사는 게 제게는 쉽고 행복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만약 릴랙스하며, 술도 마시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루틴을 지켜야 행복한 사람이라서요.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을 후회하며 ‘내가 왜 일찍 일어났을까?’ 해본 적이 없어요. 이 모든 게 저의 건강 비결인 것 같아요.”

좋은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어 영광

겸손하다. 촬영장에서 후배들을 대하는 언행을 보면 알 수 있다. 배우 조진웅 역시 김희애와의 첫 호흡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TV에서 봐온 선배라 함께하는 순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문을 연 뒤 “실제 만나보니 털털하고 좋았다. 무엇보다 선배가 보여준 에너지가 상당히 경이로웠다. 좋은 선배들을 보면 저도 후배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비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며 선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희애도 이에 화답했다. 조진웅이라는 연기 잘하는 후배와 함께 호흡할 수 있어 행복했고, 그가 본인의 둘째 아들과 닮아서 정이 간다고 해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족이 그래요. 친근하지만 매일 예쁘진 않잖아요. 아들이 말 안들을 때는 등짝을 때리기도 하는데, 둘째가 곰돌이 스타일이라 밉지는 않죠. 조진웅 씨도 비슷해요. 저는 촬영장에서 가급적 연기에만 집중하느라 배우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편은 아니에요. 조진웅 씨와 많이 붙는 장면도 없어 아주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잘못을 해도 ‘씨익’ 웃으면 모든 게 용서될 것 같은 매력이 있더라고요. 친근하기도 하지만 수줍은 모습도 있었고요. 그런 모습이 저희 아들과 비슷했죠. 곰돌이같이 친근한 매력이요.(웃음)”

김희애는 최근 영화 <서울의 봄>으로 천만 흥행을 경험한 배우 박해준에 대해서도 말했다. 두 사람은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호흡을 맞춘 적 있다.

“(극 중에서) 사랑했어요. 박해준 씨는 정말 좋은 배우죠. 내가 아주 가깝진 않지만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요. 촬영할 때 만나면 나는 항상 응원해요. 그 사람은 점점 나이 먹을수록 더 좋은 연기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부부의 세계> 촬영 마지막 날에 스태프가 꽃다발을 하나씩 안겨줬는데, 박해준 씨가 ‘이건 부탁인데 김희애 선배님 한번 안아주시면 안 되느냐’고 하더라고요. 각자 인물을 연기했는데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죠. 대사도 많고 내가 ‘케어’를 잘 못했거든요. 선배한테 의지하고 싶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힘들었겠다 싶었어요. 끝나고 나니 그 사람도 마음이 놓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깊은 뜻은 모르겠지만 마음으로 터치가 됐던 기억도 있어요.”

현장에서 배우와 스태프와 호흡하는 순간 가슴 깊이 김희애임을 새기는 배우 김희애. 천생 배우인 그는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흔치 않은 명배우다. 2024년에 보여줄 활발한 행보에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건 김희애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