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는 늘 태도에 대해 말했다. 배우가 작품을 그리고 관객을 대할 때의 존중과 예의를 중시했다. 그런 까닭에 매번 작품을 선택할 때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집중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내는, 몰입할 줄 아는 배우 설경구를 만났다.
글 남혜연 사진 제공 씨제스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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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극 출연의 무게감
다양한 장르를 만났지만 설경구는 <실미도>를 시작으로 <그놈 목소리>, <소원>, <생일>, 그리고 최근 개봉한 <소년들>에 이르기까지 실화를 소재로 한 실화극의 출연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아예 ‘운명 같다’라는 말을 한다. 특히 <소년들>에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 부여가 컸다. 영화는 지방 소읍의 한 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들을 재수사하는 형사를 그렸다. 영화 속에선 ‘우리슈퍼’로 나오지만,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 ‘나라슈퍼’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설경구는 세 소년이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수사반장 황준철을 연기했다.
이번 작품에 참여한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감독이 정지영이란 것.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공공의 적 2>, <강철중: 공공의 적 1-1>에 출연한 이후로 경찰 역은 ‘어떤 경찰을 연기하더라도 강철중 같아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간 피해왔다.
“내 딴에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해보니 이 이야기를 진짜로 알고 있던 게 아니더라고요. <소년들>을 소개할 때 ‘잘 알려진’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하지만 다 흘러가고 묻히고 지나간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사회의 모순과 그로 인한 아픔도 덮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건의 이름만 안다고 해서 그 실체까지 다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그는 최근 전주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한 뒤 이런 생각이 더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고 했다. 시사회에는 나라슈퍼 사건으로 누명을 쓴 실제 피해자와 증언을 통해 이들이 누명을 벗는 데 일조한 사건의 진범 A씨 등이 함께했다. 또 낙동강 살인사건, 이춘재 8차 살인사건 등에서 범인으로 지목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도 영화를 관람했다.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초월한 분들 같았다”며 씁쓸해했다.
“낙동강 사건 피해자분이 ‘애가 돌 때 수감됐는데 나와보니 스물 네 살이 돼 있더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요. 근데 정작 그분들은 말할 때마다 웃으시더라고요. 또 다른 공통점은 다들 약자들이라는 거예요. 무언가에 저항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분들인데 착하기까지 하세요.”
실제 사건에서처럼 영화 속에서도 소년들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결국 누명을 벗는 모습을 보여준다. 완벽하게 캐릭터에 몰입했던 탓에 힘들었던 부분도 많았지만, 정의를 표현했던 만큼 자신 있게 영화에 대해 더욱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공권력에 의해 뒤죽박죽이 된 사건을 유족과 누명 피해자들 같은 힘없는 소시민이 제자리로 가져다 놓는 과정을 그린 영화잖아요. 이 친구들은 덜 배우고 덜 가졌어요. 가족들마저 이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어요.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대로 묻혔을지 몰랐던 사건입니다. 생각보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큰 용기도 필요하고요. <소년들>이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했죠.”
영화계 대표 고무줄 몸무게 배우
설경구는 ‘고무줄 몸무게 배우’로 통한다. 영화 <역도산> 촬영 당시 촬영 기간 동안 23kg을 늘렸다가 다시 18kg을 줄인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몸무게 변화는 모두 작품 때문이었다. 설경구는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아~ 다시는 몸무게를 조절해야 하는 작품은 안할 거야!”라며 손사래를 친 적도 많다. 하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면 그런 말은 잊은 것처럼 다시 체중을 줄이거나 늘린다. 이번에는 17년 전후 비주얼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약 일주일 동안 체중을 감량했다. 17년 만에 재심에 나서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패기만만한 17년 전 황준철과 17년 뒤 늙고 힘없는 황준철의 모습이 대비되야 했다. 젊은과 늙음을 연기한 그는 “혹시 둘 다 늙어 보였나? 분장은 안 했고 머리는 까맣게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17년 후 모습은 저에게 3주 정도 시간을 준다고 했죠. 그런데 코로나가 한창이라 4인 이상 모이지 못할 때라 촬영 협조된 장소가 취소되고 비까지 오면서 촬영이 밀렸어요. 결국 일주일 정도 시간을 받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방법이 없어서.(웃음) 촬영 팀 철수하고 매니저들을 서울로 올려보내고 혼자 숙소에 남아 살을 뺐죠. 몇 키로인지 재보지는 않았는데 어지러울 때까지 뺐어요. 촬영 때문에 조금은 먹어야 해서 일주일을 다 채우진 못했고, 3~4일 정도는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좀 더 ‘갭’ 차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었어요. 예산이 적어서 기다려줄 수 없었으니까요.(웃음)”
사실 쉽게 말했지만, 배우에겐 말 못 할 고통의 시간이다. 주연 배우의 무게감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을 이끌어가야 하기에 본인의 연기 외에 주변인들을 챙기는 것 역시 그의 몫이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건강관리 역시 배우 설경구에겐 필수 조건이 됐다. 체중감량 시에는 반 공기씩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했다. 탄수화물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것. 두부와 오이 등을 주로 먹었으며, 하루 6~7시간씩 운동하며 몸 상태를 조절했다. 여기에 비타민 등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것은 필수였고, 또 실생활에서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 걷기는 당연히 포함됐다. 식이요법을 하는 동시에 필수 영양분을 몸에 보충해주고, 근육량 조절을 위해 운동을 한 까닭에 건강한 다이어트와 찌우기를 병행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살을 급격히 찌우고 빼는 작업을 하는 배우라는 직업 때문에 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건강을 지키려고 하고 있어요. 몸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고 하잖아요. 면역력이 좋을 때와 나쁠 때 살을 빼고 찌우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평소에도 운동을 하려고 노력해요. 촬영 여건상 여의치 않을 때는 단 10분이라도 줄넘기를 하고, 짧은 거리는 걸어가려고 하죠. 꾸준한 관리가 건강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건강보험> 독자 여러분들도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나만의 운동 혹은 식습관을 한 가지 정도는 정해놓고 실천하시길 바라요.”
정지영 감독처럼 나이 먹고 싶어
설경구에게는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이 있다. 물론 모든 작품이 다 잘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패를 해도 꾸준하게 작품을 해왔기에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이 가능했고,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올해만 영화 <유령>, <더 문>, <소년들> 그리고 넷플릭스 <길복순>등 무려 네 작품을 선보인 설경구는 이렇게 쏟아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다 열심히 했지만 아쉬운 점도 많다고 했다. 특히 <더 문>의 경우엔 스코어가 본인도 제작사도 충격이었다고 한다. <더 문>은 280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 부은 올 여름 텐트폴 영화로 주목을 받았지만, 누적관객 수 51만 명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보여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길복순>은 잘됐죠. 근데 OTT였어요. 극장 개봉을 못했고, 영화는 스크린에서 봐야 하는데 아이러니하더라고요. 근데 현실적으로 같이 공존해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극장의 위기는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지만 영화는 계속 상영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와 함께 그는 영화계 선배이자 <소년들>의 연출자인 정지영 감독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수십 편의 작품을 해온 배우지만, 정지영 감독과는 처음으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정지영 감독은 애초 설경구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정지영 감독님은 스태프 막내까지 동료로 생각하시죠. 모든 사람을 수평 관계로 보세요. 조감독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실 때도 다 들어주시거든요. 제목이 <소년들>인데 감독님이 소년 같으시고 마인드가 달랐어요. 나도 꼰대 모습이 나올 거라고 선입견이 있었는데,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같이 작업하는 동료로 생각하시죠. 조감독님이 무전으로 해도 된다고 하는데도, 직접봐야 한다고 하루 종일 계단을 오르내리셨어요. 나도 그렇게 나이 먹고 싶어요.”
설경구는 정지영 감독이 보여준 진정성과 뚝심에 끌려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특히 정 감독은 그간의 작품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의 연출에 믿음이 컸다. 하지만 <소년들>의 경우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한창이던 2020년에 촬영을 하면서 3년 만에 세상 빛을 봤다. 여기에 다소 무거운 소재를 다룬 영화인 만큼 흥행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운 좋게 한국 영화 르네상스였다는 2000년대에 배우 생활을 했죠. 영화가 다 잘돼서가 아니라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와 행복한 시기였어요. <소년들>이 잘되면 한국 영화가 살 것 같아요. ‘아, 이런 것도 되는구나’ 하는 거지요. 피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코미디가 아니어도 흥행할 수 있다는 걸요. 단순히 영화를 보는 동안만 즐거우면 된다는 요즘의 문화가 아쉽기도 해요. 우리 영화는 많은 이야기가 입에 오르내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