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남자
국민 드라마로 손꼽히는 <대장금>을 비롯한 대작 사극 <선덕여왕>, <허준> 속 ‘왕’으로 기억되는 배우 임호. 후학 양성을 위한 대학교수 활동은 물론, 연극 무대에서도 활발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글 김지영 사진 송인호, 수컴퍼니
데뷔 30년, 다시 시작
그의 아버지는 2016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작가 임충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하시는 일을 봐왔었죠. 늘 글 쓰시는 모습과 아버지 드라마를 보고 자랐지만 정작 저는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어요.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어요. 당장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데 고민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기보단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며칠을 속앓이하며 지내다가 아버지께 제 결심을 전했죠.”
이공계를 준비하던 소년 임호는 혼자 고민 끝에 내린 ‘대중예술’로의 진로 변경 의사를 아버지께 내비친 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아버지께서는 제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시더니 외출하셔서 예술학부 진학에 도움 될 책을 사다 주셨어요. 늘 아버지는 엄하시고 바쁘셨지만 말없이 저의 판단을 믿어주신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에 KBS 1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습니다. 당시 방송국에 가면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한동안은 아버지 작품에 캐스팅 제의가 오면 도망 다니기도 했어요. 젊은 치기에 부끄럽기도 했고, 혹여 그분의 명성에 누가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거든요.”
데뷔 3년 차에 그에게 찾아온 드라마 <장희빈>은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는 ‘왕’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저뿐만 아니라 정선경, 김원희 등 주연배우 모두 신인급으로 당시에도 파격적 캐스팅이었어요. <장희빈>은 아버지의 극본인 만큼 제게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내야 할 첫 번째 숙제기도 했죠.”
<장희빈>의 숙종을 시작으로 <대장금>의 중종, <대왕의 길>의 사도세자, <대조영>의 연남생을 비롯해 <정도전>의 정몽주까지. 유난히 사극 속 용포와 도포 차림의 그가 기억에 남는 건 그만큼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갖춘 그의 성정과 연기의 결이 같아서가 아닐까.
연기와 삶의 스펙트럼을 넓히다
그의 경력을 보면 새삼 놀라게 된다. 당대 유명한 사극과 시대극뿐 아니라 현대극에서도 출중한 연기력으로 사랑받았다. 특히 22년간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역대 TV 드라마 최장수 방영 기록을 남긴 <전원일기>의 식구이기도 하다.
“<전원일기>는 여타 작품과는 정말 달라요. 우리네 일상의 속도와 드라마 속도가 비슷했거든요. 제가 맡은 ‘금동이’ 역할 역시 아역부터 서사가 시작되었고 저는 1997년에 합류했는데 가출했다 돌아오면서 양촌리에 정착하고 극 중에서 결혼도 했죠. 작년부터 <전원일기> 식구들과 같이 예능 <회장님네 사람들>에 출연 중인데요, 배우 뿐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 울고 웃던 추억을 기억해주시는 시청자분들과 함께하고 있어 더욱 뜻깊어요.”
<대조영>을 출연할 때쯤이니 2007년도로 기억한다. 예술대학에서 특강 제의를 받고 처음 오르게 된 대학 강단에서 그는 새로운 떨림을 느꼈다고 한다.
“거의 1년에 3~4편씩 쉬지 않고 드라마를 해왔어요. 특히 호흡도 길고 촬영도 녹록지 않은 사극을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지쳐 있었는데, 강단에서 나의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해주는 학생들을 만나니 너무 좋더라고요. 내가 아는 것, 내가 배운 현장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후 저 또한 교수직에 매력을 느껴 본격적으로 준비했고, 2015년부터 백석대학교 문화예술 학부 소속 연기예술전공 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떤 교수인가라는 물음에 그는 늘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 기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장, 특히 연극 무대에서의 기초 연기 체력을 쌓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연기라는 것도 결국 체력 싸움이죠. 기본기가 탄탄해야 하는데 무대는 시작을 위한 다짐 판이 되어줍니다. 신인 배우가 드라마 현장에서 작은 역할 하나 받으면 사실 연기하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훨씬 길죠. 연극은 연습 시간도 연기하는 시간도 완전히 다릅니다. 확실하게 기본기를 채워주죠. 무엇이든지 단숨에 완성되는 일은 없어요. 차곡차곡 조금 늦더라도 기초 연기 체력이 중요해요. 그래야 배우가 직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건강, 결국은 체력
지난해 그는 TV 드라마보다 무대에서 많은 관객과 만났다.
“원래 연극 무대를 사랑해요. 무대는 배우의 피를 뜨겁게 하는 매력이 있거든요. 2019년도에는 첫 연출작이었던 <렌드미어 테너>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요. 2022년에는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과 연극 <러브레터>에 출연했어요. 행복했던 만큼 ‘아, 이제 정말 체력을 키워야겠구나’라는 결심을 다시금 했었죠.”
호흡이 긴 연극 무대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건강이 필수. 그는 평소에도 물을 충분히 마시고 질 좋은 수면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고 했다. 야구나 등산에도 일가견이 있어 즐긴다고.
“제가 잡곡솥밥을 정말 잘 지어요. 가족들 식사 때도 제가 밥 담당이랍니다. 식습관은 짜고 달고 간이 진한 음식은 피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커피나 차 종류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생수를 챙겨요. 체력은 어느 한순간에 확 늘지 않아요. 저는 기본 체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걷기’를 여러분께 추천합니다. 요즘엔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 보내고 난 뒤,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양재천을 걸어요. 두시간 코스로 걷다 보면 촉촉하게 땀이 나기도 하고, 심박수도 오르면서 기분까지 상쾌해지거든요. 함께 걷는 동안 아내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 더욱 좋은 시간이고요.”
내일이 더 기대되는 사람
“‘동안’이라는 평가는 늘 감사하죠. 단지 외모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면에서도 늘 젊음과 열정을 가진 청춘의 뜨거움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슴이 늙으면 안 되거든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익숙해진 것들에 안주하게 된다면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기 어렵죠. 늘 공부하고 배우고 또 나누는 것에 중심을 두려 합니다.
그래서 2023년은 제게 더욱 특별한 것 같아요. 강산이 족히 세 번 변했으니 저는 더욱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죠. 제가 활동하는 방송 현장에서 위로는 선배님들을 아래로는 후배님들을 이어주는 허리 역할을 자처하고요, 제가 사랑하는 대학로 무대도 좀 더 가까이하려 합니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학생들한테는 딱딱하고 어려운 교수보다는 먼저 현장을 경험한 선배의 마음으로 그들의 좋은 멘토가 되고 싶습니다.
<건강보험> 독자분들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늘 충만한 하루하루를 쌓아가시길 바랍니다. 문득 뒤돌아보면 훌쩍 커버린 자신을 볼 수 있으실 거예요.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저 임호의 행보도 따뜻하게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