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웅을 담아내는 그릇
10년 넘게 <영웅>을 연기해온 결과일까, 최근엔 어린이들도 그를 보면 ‘안중근 아저씨다’라며 알은체를 한다. 뮤지컬 초연부터 영화까지 ‘안중근’ 역을 연기한 배우 정성화는 그래서 더욱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했다.
글 김지영 사진 (주)파크위드엔터테인먼트
운명의 수레바퀴, 뮤지컬 무대를 향하다
‘뮤지컬 티켓파워’, ‘믿고 보는 배우’, ‘공연 흥행보증수표’. 지금은 이러한 수식어들이 배우 정성화를 따라다니지만 처음부터 쉬웠던건 아니라고.
“1994년 공채로 방송국에 입성했을 땐, 정말 겁날 게 없었어요. 93학번인 제가 이듬해에 공채가 되었으니 금방이라도 스타가 될 줄 알았죠. 하지만 반짝 주목받다가 다시 일이 끊기고, 또다시 반짝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제게는 ‘열심’과 ‘간절함’이 없었어요. 그야말로 연예계 데뷔 10년 만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고 그곳은 대학로였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무대에 도전한 중고 신인이었죠. 2004년 코미디뮤지컬 <아이러브 유>는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바닥을 치고서야 눈이 번쩍 뜨였다는 그는 당시 파트너였던 1세대 뮤지컬 스타 남경주의 조언으로 멜리사 브루더의 『배우 수첩』, 우타 하겐의 『산연기』 등을 추천받아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타고난 노래 실력, 유머 감각과 TV 드라마로 익힌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뮤지컬에 영혼을 갈아 넣은 것.
“제가 할 수 있는 건 무조건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연습하고 반복하고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개그맨 정성화’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관객을 놀라게 해야만 했죠. 연습실 근처에 숙소를 구해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매일 평가받는 무대 공연 역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진하는 것만이 관객의 시간과 돈,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거든요.”
그의 무대에 대한 집착과 열정에 응답하듯 <맨 오브 라만차>, <라디오 스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연이어 주연을 맡았고, 드디어 운명과도 같은 뮤지컬 <영웅>을 2009년에 만나게 된다.
흔들림 없는 태산처럼, 영웅을 품다
“안중근 의사는 오롯이 나라를, 나라만을 생각하시는 분이셨어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분의 마지막 1년을 담아낸 창작 뮤지컬 <영웅>을 하면서 제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유묵 중에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란 글이 있어요.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는 의미죠. 마치 제게 해주는 말씀 같았습니다. ‘안중근을 연기한다고 뽐낼 생각 마라. 항상 최선을 다하고 공손하라’라고요.”
뮤지컬 <영웅>은 그에게 각종 뮤지컬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쥐여 주었고, 초연뿐 아니라 14년간 총 7회의 국내 공연과 뉴욕과 하얼빈 해외 공연에서도 안중근 의사를 연기했다. 윤제균 감독은 무대 위에서 안중근을 연기하는 그를 보고선 깊이 감동하였고 이내 뮤지컬 <영웅>의 영화화를 계획했다.
“영화계 쪽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고 해요. 제가 아무리 뮤지컬 쪽에서는 알아준다고 해도 대작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마땅하지 않다고들 하셨다고요. 하지만 윤제균 감독님의 뜻대로 제게 큰 기회가 주어졌고, 오리지널 캐스트로서 더욱 완벽한 모습의 안중근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영화와 무대의 가장 큰 차별점은 섬세한 표현입니다. 그야말로 연기하는 배우의 솜털까지도 스크린에 투영되니까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아내는 만큼 우선 체중 감량이 필수였습니다. 또한 영화 촬영임에도 대부분의 뮤지컬 가창 부분이 라이브로 현장 동시녹음 되었습니다.”
고여 있지 않고 더 위로,
더 넓은 곳을 향하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민족의 영웅이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한 의거의 주역인 안중근의 삶을 표현하는 배우 정성화. 뮤지컬 무대에서의 그의 연기는 인정받았지만, 영화화되면서 그야말로 ‘정성화의 안중근’ 역할이 대중의 평가대에 올랐다.
“안중근 의사의 인생, 그분의 모든 것을 상영 시간 내에 표현하려면 제가 달라져야 했습니다. 우선 혹독한 다이어트를 시작했습니다. 영화 촬영 당시에 뮤지컬 무대 공연도 하고 있었는데, 무려 14kg까지 감량했으니 거의 지옥 훈련 그 자체였죠. 무대가 끝나면 바로 헬스장을 찾았고, 식사량을 줄이고 무조건 뛰었습니다. 너무 급하게 다이어트를 해서인지 무대 공연 때 기절한 적도 있었어요. <건강보험> 독자 여러분도 너무 심한 다이어트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도 촬영이 끝나고 고삐가 풀려서 야식을 먹었더니 역류성 식도염에 걸리더라고요. 건강을 되레 해치실 수도 있어요. 지금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아니죠. 좋은 배역 제안이 온다면 이번엔 건강하게 체중 조절을 해보겠습니다.(웃음)”
오래도록 관객의 곁에서 매번 다른 색깔의 연기를 하며 죽을 때까지 배우로 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친 그. 노래 레슨, 연기 수업은 물론 매일 개인 연습실에서의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는다. 최상의 무대 컨디션을 위해 애주가임에도 공연 중에는 절주하고 건강을 위해 등산을 즐긴다고 한다.
뜨거운 울림, 안중근을 기억하는 3월
영화 <영웅>의 리멤버 상영회가 열린 지난 2월 14일은 1910년 일본 재판관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날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창작뮤지컬이자 최고의 흥행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영웅>은 초연부터 지금까지 관객 수 100만을 넘겼는데, 영화는 개봉 38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어느 시험문제에서 ‘안중근은 애국자다’가 정답이었는데, ‘안중근은 정성화다’라는 답변이 달렸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도 책임감을 느끼며 진심으로 안중근 의사를 표현하겠습니다.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안중근 의사,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에게 관심이 커졌다는 관객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영화를 N차 관람하였다는 분들이 많아서 감동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선언일이며, 올해로 104주년을 맞이한다. 안중근을 연기하기 때문일까, 배우 정성화에게는 봄을 기다리는 3월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고.
“격랑의 시대에 나라와 평화를 생각하는 마음뿐이었던 안중근 의사를 여러분께 오롯이 느끼게 해드리는 게 제 책무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이 많은 분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이뤄낸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번 3·1절에는 독자분들께서 마음에도 태극기 하나씩 품으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소망하는 일들 모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