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핫 스타

차트 역주행으로 40년 무명 설움 씻은
가수 진성
“혈액암 태클로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안동역에서’, ‘태클을 걸지 마’ 등의 히트곡으로 역주행 신드롬을 일으킨 늦깎이 트로트 황제 진성.
가난과 무명의 설움을 딛고 일어서려는 찰나 혈액암과 심장판막증이라는 인생 태클과 마주한 시간이 있었다.
큰 병에도 건강보험 덕에 싸게(!) 잘 해결할 수 있었다는 그를 만났다.

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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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충열

가수 진성

심금을 울리는 소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성의 노래가 그렇다. 슬픔을 삼키며 단련된 진성의 노래는 사람 마음을 속절없이 흔드는 마력이 있다. ‘님의 등불’에는 시련을 헤쳐간 의지가 담겨 있고, ‘보릿고개’에는 배고프던 유년기의 설움이 녹아 있다.

한 서린 듯 애절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해낸 사람 특유의 긍정적 힘이 있어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다. 가난, 외로움, 슬픔, 투병 등 그가 겪은 아픔이기에 듣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응원이 된다. 진성은 40년이라는 무명의 터널을 거쳐왔기에 인생의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슬픔을 삼키며 보릿고개를 넘은 노래 신동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로 시작하는 보릿고개 첫 소절은 진성의 어린 시절과 닮아 있다. 가정 불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집을 나가면서 세 살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 어린 진성은 형과 함께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끼니처럼 먹으며 자랐다. 열한 살까지도 호적에 오르지 못해 열두 살에 처음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할 정도였다. 고구마 하나로 하루를 버텼고, 시골 장터에서 설거지를 하고 국밥값을 대신한 적도 있다. 동네 양조장의 술밥을 훔쳐 먹다 걸려서 술독에 갇히는 벌도 받았다. 그렇게 헤어진 지 8년 만에 부모님과 다시 살게 됐지만, 그것도 1~2년간의 행복으로 끝났다. 떠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나를 데려가달라”고 애원했지만, 옆에서 모질게 떼어내던 외삼촌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도 ‘다시는 당신들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미움과 원망을 키웠다. 배고프고 서러운 유년 시절은 그렇게 평생의 상처와 괴로움으로 남았다.

당시 어린 진성을 위로하고 달래준 것은 노래뿐이었다. 노래는 그렇게 진성의 운명이 됐다.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운 어린이는 노래를 부르며 가슴에 맺힌 외로움과 슬픔을 풀어냈다. ‘노래 신동’이라는 칭찬은 그 시절 기억하는 유일한 기쁨이다.

가수 진성
아랫목처럼 따뜻한 중년의 러브 스토리

진성은 무명 시절을 야간전투에 비유한다. 노래를 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제대로 된 생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장이 되어 누군가를 책임질 능력이나 자신도 없었다. 그때 운명처럼 만난 것이 지금의 아내 용미숙 씨다.

“단골 식당 사모님과 지금의 아내가 친구였어요. 아내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목소리가 좋아서 제 메들리 테이프를 5년 동안 듣고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노래가 맺어준 평생의 인연이죠.”

용미숙 씨는 진성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고운 목소리와 달리 얼굴이 소도둑처럼 생겨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때 진성의 나이가 마흔아홉, 불꽃 튀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뭉근한 아랫목처럼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에 망설이자 용미숙 씨가 먼저 “당신 벌어서 당신 먹고, 내 건 내가 벌어먹을 테니 프리하게 가자”고 제안했다.

평생의 동반자가 된 용미숙 씨는 진성 씨에게 평생 설움을 잊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줬다. 진성이 병상에 있을 때는 그의 병에 백도라지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큰 낙상 사고도 당했다.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산을 타다가 바위틈에서 백도라지꽃을 본 거예요. 다른 사람이 먼저 캘까 봐 급하게 달려가서 캐다가 6m 되는 바위에서 추락했죠. 머리를 7~8바늘 꿰매고 전신 타박상에 얼굴도 다 까졌어요.”

깊은 산중이라 병원에 도착하는 데도 1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진성은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얼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진성은 부모에게도 받지 못한 큰 사랑을 아내에게 받으며 어린 시절의 설움을 비로소 털어낼 수 있었다.

사랑은 최고의 명약입니다.
저를 다시 일으킨 것은 아내의 헌신적 사랑과 팬 여러분의 열정적 사랑이었습니다.

회복기 환자의 마음으로 산다

진성의 인생에서 최고 위기는 ‘안동역에서’로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다. 무명 생활에서 벗어나 한창 떠오른 2016년에 림프종 혈액암과 심장판막증 판정을 동시에 받은 것이다. 평소 운동을 즐기며 체력에 자신이 있던 그였기에 큰 충격이었다. ‘왜 하필 내가?’라는 원망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초조함이 늘 함께했어요. 노래를 하며 한잔 술에 밤이 새는지도 몰랐고,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죠. 이런 것들이 지층처럼 쌓여 병으로 나타난 것이더군요.”

노래 부를 때 고음 파트에서 숨을 몰아쉬었는데, 심장이 좋지 않아 그런 줄도 몰랐다. 검사 결과 심장으로 가는 동맥 3개 중 2개는 완전히 막혔고, 1개는 반 정도 막힌 상태였다. 의사가 “이런 상태로 어떻게 노래를 했냐”며 놀랄 정도였다. 노래를 하면서도 몸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지금은 아내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심장판막 수술도 잘 마쳤고, 완치에 가까울 정도로 림프종 혈액암 관리도 철저히 하고 있다. 큰 병에도 암환자 등록(중증질환 산정특례제)으로 큰 돈 들이지 않고 이겨낼 수 있어 참 다행이라며 웃는다. “암환자들의 돈 걱정을 덜어준 고마운 정책”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데, 사실 삶 자체가 스트레스잖아요. 근데 큰 병을 앓고 나면 한발 물러서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거슬리는 말도 적당히 흘려들을 수 있게 되고요.”

진성은 ‘회복기 환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세상이 조금 달리 보인다고 말한다. 세상의 끝에서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병을 이겨내면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좋은 목과 재능을 주셨기 때문에 사랑받는 가수가 되었잖아요. 그것만 해도 참 감사한 일이죠.”

진심이 닿는 곳에 진성의 노래가 있다

진성은 ‘이유 없는 친절은 사기’라는 철칙을 갖고 산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노력 없는 결과에도 기대지 않는다. 기나긴 무명 생활 탓에 힘든 일도 “이게 뭐 고생인가?” 하고 무심히 넘기며 살아왔다.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가수 진성의 가장 큰 장점이 됐다. 그래서 인기 절정의 지금도 ‘거저 얻는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못난 놈’, ‘지나야’, ‘상팔자’ 등 네 곡의 자작 신곡을 발표하며 적극 활동 중이다. 무명 시절에도 돈보다 히트곡이 없는 것이 매일 고통이었다고 말하는 진짜 ‘찐 가수’다.

아프고 나니 팬들의 사랑도 이전보다 더 크고 감사하게 느껴진다는 진성. 항암 치료를 끝낸 뒤 행사장에서 만난 팔순의 노모 팬은 그의 손을 잡고 “진성아, 이제 아프지 마라”며 쌍가락지 중 하나를 빼서 그의 손에 끼워줬다. 투박하지만 아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 언제나 진심으로 노래를 한다. 이렇듯 마음과 마음이 닿는 접점에 진성의 노래가 있다. 팬들을 향한 그의 노래에 더 이상의 태클은 없다.